- 『어머니공부』 본문

초보운전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2.5.12
맺음말을 대신하여
통상 맺음말은 본문 내용을 축약해 결론을 재확인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보다 저의 어머니 공부가 미진한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향후 공부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다. 비천한 남자가 나에게 묻더라도 텅 빈 것 같지만 나는 그 두 끝을 살펴서 다할 뿐이다."(이기동역)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자왈 오유지호재 무지야 유비부문어아 공공여야 아고기양단이갈언)
-논어 자한 9/7
두 끝을 살피는 고기양단(叩其兩端)이야말로 어머니가 평생 관철한 중용의 정신을 요약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일반인이나 저의 세계 인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도식화해 살펴보겠습니다.
① 양단(兩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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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의 일단(一端)에 모두 미칠 수 있으며 거기서부터 취한 중용이라 진폭이 아주 넓습니다.
② 절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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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도 자기의 세계 인식 범위 내에서 중용의 길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경험이 없어 양쪽의 일단에도 가 닿아보지 못합니다. 양단의 왼쪽에 치우치든지 오른쪽에 치우치든지 간에, 또는 그 점유 길이가 짧든지 길든지 간에, 그저 양단 사이의 일정 범위 내에서 나름의 안착지를 점합니다. 그와 같은 절충은 '유사(類似) 중용'이라고 하겠습니다.
③ 일단(一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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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고민은 ①, ②를 취할 수 없는 문제의식에 있었습니다. ①처럼 양단을 파악해 중용을 취하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②와 같은 절충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②는 자기가 세상의 어느 지점에서 부유(浮遊)하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방식, 좀 극단적 표현을 쓰자면 자기를 속이며 사는 길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택한 방식이 일단에라도 가보고 나서 그것을 기점으로 ①에 접근하자는 방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양단을 살피셨던 드문 분입니다. 만약 제가 ②를 택했다면 절충 늪에 빠져 어머니의 면모를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일단(一端)이라도 가봤기에 어머니의 지형을 그려볼 수는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②가 아무리 ①에 근접한 '유사 중용'이라도 그 위상을 획정해낼 줄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애초 ③이 한시적 선택이었던 만큼 시간이 갈수록 ①의 길이 요원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사십대에서 오십대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이같은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불혹(不惑)의 사십대에는 일단(一端)의 세계 인식만으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천명(知天命)의 오십대에 들어서는 여지없이 균열이 생기고 있습니다. 천명을 안다는 것이 그만큼 버겁기 때문입니다. 천명은 무슨 뜻입니까.
「(스스로의 좁은 안목과 제한된 구도에 대해 아무런 의혹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 자신의 제한된 인식 안에서 살아간다. 그 인식이 엮는 세계관은 바로 그들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아주 단단하다. 만약 누군가가 이 단단한 세계의 피각을 뚫고 그 바깥의 경지를 호흡하고자 한다면 그는 우선 아직 자신이 알지 못하는 진정한 세계가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른바 "천명을 알다"(知天命)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인식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인식을 견지할 수 있을 때, 그 바깥의 세계는 마치 우리가 그것을 인정한 것에 대한 보상처럼 우리의 판단과 행동과 거취를 그때그때 부지해 주는 힘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일차원적 선악의 세계를 어짊을 통해 넘어섬으로써 더 높고 넓은 필연의 세계에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수태, 『논어의 발견』, 264p
일단(一端)은 일차원적 선악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천명은 제한된 인식의 바깥에 존재합니다. 어짊의 문지방을 딛고 넘어서야만 진입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저는 문지방 앞에 서성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어머니의 인(仁)을 체득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공부』는 천명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쓰여진 미숙한 글이라는 점을 맺음말 대신에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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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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