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나단 2012년
북뉴스조나단
- 작성일
- 2012.6.22
십자군 이야기 2
- 글쓴이
- 시오노 나나미 저
문학동네
역사는 살아 움직인다. 멀리서 바라보기에 그렇게 느꼈졌을까? 한편의 드라마처럼 십자군 전쟁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시작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시대라고 치부했었던 전쟁의 한복판안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십자군 이야기>를 읽으면서 말이다. 한번도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었던 인물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하고, 그들의 삶이 아련하게 가슴을 아프게도 만들어 버리니, 이 움직이는 역사와 글을 써내려간 시오노 나나미 여사에게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몇주에 걸쳐 <십자군 이야기>를 들고 다니니, 누군가는 잘난 시오노 나나미의 자뻑을 잘 읽었느냐고 말을 건내기도 했다. 그래. 무지 잘났지. 내 부족함이 그녀의 자만심과 오만함에 점점 작아져 버린다. 아는 것 많고 너무나 잘난 그녀에게 말이다. 그래도 대단하다. 그녀처럼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생각을, 인문학 책을 통해서, 이런 역사서를 통해서 처음 가져본다. 나의 10년 후, 20년 후를 말이다.
어째서인지 인재는 어느 시기에 한쪽에서만 집중적으로 배출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현상도 시간이 좀 지나면 잦아들고,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인재가 집중적으로 배출된다고 <십자군 이야기 2>는 시작된다. 그리스도교측에서 배출 된 남자들에 이야기를 그린 1권에 이어 2권은 이슬람측에서 배출된 남자들의 이야기다. 1권을 읽으면서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던 고드프루아, 보두앵, 보에몬드, 탄크레디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가 버렸다. 십자군 역사의 제 1세대들이 퇴장함과 함께 예루살렘은 풍전등화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어디서도 받쳐주지 않았음에도 유럽인들은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 아래로 다시 돌아온 것은 신의 도움 덕이라고 믿고 있었다. 신이 성도 탈환까지 도와주었으니, 긴 바닷길을 거쳐 팔레스티나에 상륙하고,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의 안전도 지켜줄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이들이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예루살렘의 왕은 그들의 안전도 책임을 져야 했지만, 가장 우선시 되는것은 예루살렘을 지켜내야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예루살렘 왕은 먼 유럽에 사는 사람의 눈에는 강력한 지위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약체였다. 그러므로 개인의 인간적인 매력이 더욱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책속 인용문을 보면,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왕권은, 왕 개인이 충분히 강력하고 그에 따라 왕국 내의 유력자들을 통솔할 수 있었을 때만 충분히 발휘되었다."(p.55)스티븐 런치먼이 이야기를 한다. 이 '힘'이란 군사력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후나 병사들이 그 사람이라면 따르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도 훌륭한 '힘'이다. 지도자에게는 카리스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고드프루아가 그랬고, 보두앵이 그랬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해도 할말이 없음에도 그들을 믿고 주위에서 자신의 군사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1096년부터 1099년 예루살렘 정복을 거쳐 보두앵 1세가 죽은 1118년 까지 22년 동안은 이 인간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던 남자들이 이끌던 시대였던 것이다. 물론, 허를 찔린 이슬람측에 방어준비 불충과 각 영지의 태수와 영주 사이의 불화와 이슬람측의 분열도 한 요인이 된것은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성지순례를 오기시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잇따르면서 유럽에서는 다시 제2차 십자군들이 결성되기 시작한다. 이번엔 누가 주축이 되었을까? 꾸부정한 모습. 세속을 벗어난 것 같은 사토파에 '싸우는 수도사' 베르나르두스. 1145년 2월 초 베르나르두스에게 심취했던 사람 중 하나가 에우게니우스 3세라는 이름으로 로마 교황에 취임하면서 제 2차 십자군은 급속도로 조직이 되기 시작한다. 수도사임에도 싸움을 하자고 계속 찌르고 있는 베르나르두스에게 반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프랑스왕 루이 7세, 왕비 엘레오노르가 그에 밑에 무릎을 꿇더니,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독일황제 콘라트 3세가 동조를 한다. 1차 십자군 원정과 달리 2차 십자군 원정에는 왕과 황제가 움직있다. 제후들만으로도 십자군 원정에 승리를 했던 1차를 생각한다면 이번은 누워서 떡먹기 쯤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왕밑의 제후들이 따라 움직임으로 얼마나 많은 이동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양군 모두 제1차 십자군이 성공한 덕을 보려고 했는지, 예전에 고드프루아나 보에몬드가 밟았던 길을 택한다. 여전히 야만인들이라고 이슬람측을 생각해서 였는지, 그냥 그렇게 하면 되겠지, 신이 도와주시니까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역사속에서 승리의 여신은 이슬람측으로 옮겨간 듯 했다. 장기라는 인물을 통해 이슬람이 일어서기 시작하더니 그의 아들 누레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투를 한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2차 십자군은 유럽으로 꽁무니를 빼기 시작한다. 2차 십자군의 누구와도 전투블 벌여본 적 없는 남자. 누드 알딘, 그리스도교도들이 누레딘이라 부른 이 남자, 서른여섯 살에 현재의 이라크 북부에서 시리아 전역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의 지배자가 된 이 남자가 제 2차 십자군 전쟁의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다. 제2차 십자군은 적에게 타격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적을 강력하게 해주고 말았다. 서로 싸우고 단결하지 않은 이슬람 영주들이 한사람, 그것도 너무나 유능한 한 사람 아래로 결집하게 된것이다. 리아를 상징하는 도시, 다마스쿠스. 고대에는 여섯 개의 로마 가도가 모이는 도시였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북상한 이슬람교도가 중동에서 제일 먼저 노렸던 곳.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이 바그다드를 건설하고 그곳을 수도로 정하기 전까지, 이슬람 세계 전체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에 장기에 이은 누레딘이 우뚝서기 시작한것이다.
이제 십자군측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을까? 1세대의 퇴장과 함께 끊임없이 보두앵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은 나오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곳에 보두앵 4세가 바톤을 이어받는다. 아모리1세와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의 아들로 14세에 왕위의 오른 보두앵 4세는 나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별칭은 '문둥이왕 보두앵'이다. 병약하였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았다. 약한몸이었음에도 전쟁중엔 언제나 선두에 섰고, 몸을 가눌수 없을때에는 말에 몸을 묶어서 전쟁터로 나간 어린 왕. 이런 왕을 보면서 누군들 그를 뭉둥이라고 멀리하고, 나만 살겠다고 할수 있었을까? 11185년 3월 16일,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는 세상을 떠난다. 완전히 불태웠다고밖에 할 수 없는, 스물네 살에 맞이한 죽음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보두앵 5세는 1년만에 죽고, 예루살렘 왕국은 왕 뤼지냥과 여왕 시빌라가 지배하게 된다. 내세울것이라고는 얼굴밖에 없다는 뤼지냥과 죽어라 지멋데로 하는 여왕 시빌라. 예루살렘의 운명은 이때부터 결정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예루살렘이 버티고 있었던 것은 병원기사단과 템플기사단의 영향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십자군 전쟁하면 당연하게 따라붙는 병원 기사단과 템플기사단.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젊은 학도는 유럽에서 본 것과 비슷한 기사단들의 성채에 의문을 품는다. 기사단. 수도사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을 지키는 군사력을 가진 기사들. 유럽의 성채 생활을 했던 병원 기사단과 하나님 하나로 모여들었지만, 질서가 잡히지 않은 템플 기사단. 그들이 만든 성체는 작은 인원으로 방어를 할수 있는 무기였고, 그것은 중근동에 오기전 유럽의 성채에서 나고 자랐던 병원기사단들이 자연스럽게 터득한 노하우를 중근동에서 살려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성채는 병원기사단에서 부터 시작된다. 사회의 하층 계급 출신인 템플기사단은 성채 생활을 한 경험이 없어서 성채 건축이 뒤쳐졌을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어쨌든, 적은 인원으로, 이 독립적인 기사단은 예루살렘을 지켜냈다.
이제 누레린에서 이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살라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별볼일없다 여겼던 여린 살라딘이 이스라엘을 강하게 붙들기 시작한다. 드디어 마흔 아홉살의 살라딘 각본, 연출, 주연의 역사상 전무후무하다는 '하틴전투'가 벌어졌다. 중심이 없는 싸움, 집결처가 없는 싸움은 뻔한 싸움이 된다. 인간적인 매력이라고는 잘생긴 것 하나밖에 없는 예루살렘 왕 기드 뤼지냥에게서 무엇을 보고 따랐겠는가? 결국 이 전무후무한 전투는 예루살렘 왕 기드 뤼지냥, 뤼지냥의 동생 두명, 모테라토 후작 굴리엘모, 제멋데로였던 르노드 샤티용, '성십자가'를 받쳐드는 역할을 한 아코 주교, 템플 기사단 단장 제라르가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히고, 예루살렘 왕국내의 유력한 영주인 발리앙 이벨린과의 대치가 있긴 했지만, 예루살렘은 살라딘에게 넘어간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는 소식은 중근동에서 멀리 떨어진 유럽에까지 순식간에 퍼져나가, 유럽에 사는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유럽전역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영국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십자군 역사상 가장 화려한 조합의 제3차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 속속 중근동으로 향하기 시작하고 나는 지금 8차 까지의 <십자군 이야기>를 기다리는 행복한 구름위를 걷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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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