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나단 2013년
북뉴스조나단
- 작성일
- 2013.5.31
왜 흥선 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펼쳤을까?
- 글쓴이
- 이정범 저
자음과모음
흥선 대원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척화비'다. 얼마전에 한국사 법정 44권을 읽었는데, 그 내용이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였다. 천주교 박해는 천주신앙이 들어온 이후 끊임없이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 역시 흥선 대원군이 먼저 떠오르는것이 사실이다. 이 역사적 사건들 속에 중심을 잡고 있는 인물 흥선 대원군은 여전히 세도 정치를 무너뜨리고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 보는 측면과 문호 개방을 반대하여 조선의 개화를 늦게 만들었다는 측면으로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갈리고 있다. <왜 흥선 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펼쳤을까?>에서는 흥선 대원군 시대에 평안 감사, 우의정등을 지냈던 박규수가 흥선 대원군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이제 그들이 이야기하는 변을 들어보자.
박규수(1807년~1876년)는 조선 후기의 개화사상가이다.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서 개화파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눈을 떴다. 흥선 대원군의 고집이 조선에 암울한 미래에 일조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서 재판을 열었다고 한다. 흥선 대원군(1820년~1898년)은 고종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진 사람이다. 역사공화국 법정에서 대원군은 세도 정치로 피폐해진 조선의 기강을 바로잡고 나라를 굳건하게 지켜 내야만 했기 때문에 쇄국 정책을 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어떤 이야기가 옳은 것일까?
19세기 말, 세계는 큰 변화를 겪었다. 제 2차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상품의 원료를 얻고, 상품을 팔고, 자본을 투자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게 되면서,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약소국을 지배하고자 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것을 '제국주의'라고 하는데, 영국, 독일, 포르투갈 등 유럽 강대국들은 경쟁적으로 해외에 자국의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은 네델란드로부터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게 되면서 '정한론'을 들고 일어났고,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전쟁에서 폐하면서 청나라를 받들었던 조선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조선입장에서 청나라는 세상의 중심이었으니 말이다.
조선은 고종이 열두살에 즉위하면서 그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펼치게 된다. 세도정치의 주력 세력들이었던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쇄국정책으로 조선을 지키려고 했던 인물이 흥선 대원군이다. 이를 혼란스러운 조선 후기에 자주적인 민족 사상을 체계화시킨 최익현은 흥선 대원군은 상황에 따라 정치적인 입장을 취한 것 뿐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직 왕권을 강화하고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골몰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때는 서양 세력이 조선에 밀려들어 올 것을 걱정하여 천주교를 용인하려고 했다가 유림의 압력이 두려워 억지로 쇄국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은 처음부터 쇄국 정책을 펼치려고 했던게 아니란 말인가?
유림 세력들이 신념에 따라 위정척사를 주장한 것과는 다르게 흥선 대원군은 위태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 해서 쇄국정치를 펼쳤다고 이야기를 한다. 척주교를 박해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였다는 것이다. 흥선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일찍이 천주교에 귀의한 신자였고, 그 때문에 흥선 대원군이 처음엔 천주교에 호감을 갖고, 천주교 신부들을 통해서 서양세력을 막으려 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천주교 4대 박해 사건이라는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와 병인박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원군이 집권하는 동안 조선은 제너럴셔먼호 침략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같은 서양 세력의 무력 도발을 계속 겪었다. 그뿐인가?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던 사건은 충효를 강조하는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충격적으로 생각한 만행이었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병인양요를 일이키고, 강화도에 침입하여 강화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각종 서적과 문화재를 약탈해 갔는데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조선의 문화재 3000여점은 지금까지 반환하지 않고 있다. 이랬기에 대원군이 그들을 오랑캐라고 한것도 과장은 아니다.
대원군과 박규수에 주장을 들으면서 누가 옳고 그르다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개화만이 조선에 살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과 개화가 조선을 망친다고 생각했던 사람 모두 조선을 위한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초등학생이 대학생과 똑같은 수학 문제를 푼다면 정신력만 강하다고 이길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어야지, 정신력 가지고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쇄국을 강조해도 개항을 요구하는 외국의 무력을 막을 수 없는 상항에 이르러 대원군은 천주교를 허용하고 쇄국정책을 풀기 시작한다. 역사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다. 졸졸던 흐르던 산골짜기 물이 바다에 이르면 누구도 그 길을 막을 수 없는 것 처럼 말이다. 두 사람에 주장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이 살었던 시대를 알아야하고 역사를 돌아봐야만 한다. 역사는 돌고 돌아 어떤 모습으로 우리앞에 나타날지 알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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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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