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아주 사소한 이야기

정아은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6.1.15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다녀오면 담당 직원 때문에 언제나 속이 뒤집어진다. 기껏해야 나랑 다를 바 없는 사무직인 주제에 공무원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그 터무니없는 고자세에 화가 나서 고객 불편 신고엽서를 쓸 뻔한 적도 있다. 우리 회사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비자 신청을 내가 매번 대행해주는데, 필요한 서류를 완벽하게 준비해 가도 담당 직원이 어찌나 뻣뻣하게 말도 안 되는 서류를 요구하는지 그 심술에 내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다. 오늘 내 서류를 접수한 사람은 3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직원이었는데, 이 사람 또한 고자세로 앉아 똑같은 질문을 서너 번쯤 되풀이하더니 느닷없이 내 휴대전화 번호를 물어보는 게 아닌가.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미쳤나.
“제 재직증명서에 사무실 전화번호 적어놓았거든요? 그쪽으로 거시면 항상 제가 받습니다.”
“아니 사무실 말고 핸드폰 번호.”
“사무실로 하시면 제가 바로 받는다니까요?”
“이 아가씨가 피곤하게 같은 말 여러 번 시키네. 누가 사무실 전화하면 받는 거 몰라서 이래? 퇴근 후에 7시 8시쯤 전화 걸어서 물어볼 말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러는 거지.”
순간 나는 살의를 느꼈다.
“근무 시간 내에 전화해주세요.”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아가씨 답답하네. 내가 바빠서 근무시간보다 밤중에 전화할 일이 더 자주 있단 말이야. 그럼 아가씨가 밤 9시에 전화해도 사무실에서 전화 받을 거냐고.”
떨려 나오는 내 목소리도 커졌다.
“근무 시간 내에 전화하시면 되잖아요.”
다른 직원들이 하나 둘씩 우리 쪽을 쳐다보자 그는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수령증을 집어던지다시피 내주었다.
“됐어, 됐어. 가르쳐주기 싫으면 관둬요. 참 별 꼴 다 보겠네. 기가 막혀서…….”
나는 부들부들 떨다가 간신히 수령증을 집어들었다.
“확인서 찾으러 언제 다시 와요?”
“에이알에스로 확인해보고 알아서 와요.”
그는 도망치듯 일어서서 나가버렸다. 점심시간인 듯 직원들 모두가 우르르 나가면서 나와 그 직원을 흘끔거렸다. 나는 벌게진 얼굴로 고객 불편 신고엽서를 5분 동안 만지작거리다 출입국관리소를 빠져나왔다.
“그래봤자 결국 공무원 아니야? 안 갖고 온 거 없나 검사하고, 결재 올리고, 그게 다잖아.”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재형에게 출입국관리소에서 있었던 일을 거품 물고 쏟아냈다. 재형의 회사가 출입국 관리소에서 가깝기 때문에 출입국관리소 일을 마치면 꼭 재형을 만나 점심을 먹는다.
“그게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고 그렇게 거만하게 굴어? 국민 세금으로 월급 받는 놈이. 이재형, 너도 나중에 그 아저씨처럼 되는 거 아니야?”
작년 12월, 재형은 갑자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면서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름만 대면 다 아는 A사에 다니는 사람이 웬 공무원 시험? 그냥 해보는 소리겠지 싶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재형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퇴근 후 인강을 들으며 공부한다.
“시험 붙어서 제발 그 아저씨처럼 됐으면 좋겠다.”
재형이 스파게티 맨 위에 얹혀 있던 새우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잡아뜯었다.
“너 정말 공무원 시험 볼 거야?”
내가 포크를 내려놓고 정색을 하자 재형이 씹던 새우를 급하게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려고.”
“왜?”
나는 재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라니?”
“너 지금 다니는 회사, 다들 못 들어가서 안달하는 데잖아. 그런 델 그만두고 왜 공무원을 해?”
재형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우리 회사……길게 다녀봐야 한 십 오년 다니나? 빠르면 마흔 초반에 그만 두는 사람들도 있어.”
“그게 무서워서 벌써부터 그만두고 공무원을 해? 공무원이라고 안전할 거 같아? 너, 요즘엔 공무원도 안정적인 직업 아니다.”
나는 빠르게 쏘아붙였다. 재형의 태도나 설명이 왠지 미심쩍었다. 무엇보다, 재형은 그렇게 까마득한 미래를 내다보고 인생을 설계할 정도로 치밀하고 계산적인 성격이 아니다.
“야, 누가 들으면 시험에 붙기라도 한 줄 알겠다. 일단 시험에 붙고 얘기하자. 얼른 먹어. 스파게티 불어.”
재형이 후룩후룩 소리를 내며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스파게티를 말아올리다 말고 쩝쩝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재형의 입을 쳐다보았다. 음식 먹을 때 소리 내지 말라고 내가 몇 천 번 얘기했는데 재형은 좀처럼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평소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결혼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까 그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착하고 성실하게 느껴졌던 미덕들도 다 둔하고 눈치 없는 행동으로 보인다. 이 멍청한 자식, 공무원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식습관이나 바로잡았으면 좋겠네.
- 좋아요
- 6
- 댓글
- 68
-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