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아주 사소한 이야기

정아은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6.1.20
일주일 후 에이알에스로 확인해보니 비자발급 확인서가 나와 있었다. 나는 출입국관리사무소로 가서 비자발급 확인서를 받은 뒤 고객 불편 신고엽서를 썼다. 엽서를 넣고 돌아서다가, 지난번에 내 휴대전화 번호를 물었던 남자직원과 마주쳤다.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는 싸늘하게 나를 바라본 뒤 성큼성큼 자리로 돌아가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일 잘 끝났어?”
건물 밖으로 나오니 재형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따뜻한 봄날,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재형의 걷어올린 와이셔츠 소매가 하얗게 빛났다. 나는 눈부신 듯 손차양을 만들며 나를 쳐다보는 재형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재형은 하얗고 둥근 얼굴에 아래로 처진 순한 눈매를 갖고 있다. 내가 ‘끝없이 처진 눈’이라고 놀리곤 하는 그 눈매는 웃을 때 생기는 엄청난 주름들과 함께 재형의 탈바가지 같은 인상을 완성시키는 일등공신이다. 내 기분 에 따라 선량해 보이기도 하고 답답해 보이기도 하는 다채로운 얼굴이다.
“고객 불편 신고 엽서 먹이고 나왔어. 나쁜 자식,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고?”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앞에 있는 돌멩이를 발로 찼다. 재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여경아, 진짜……엽서 썼어?”
“그런 새끼는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돼. 지 월급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는데 그런 수작을 부려?”
나는 입술을 깨무는 시늉을 하며 재형의 표정을 살폈다. 재형의 표정이 굳어지고 입술이 일그러졌다. 무난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을 타고난 재형은 모나거나 단호한 것에 생래적인 거부반응을 보인다.
“우리 밥 먹으러 갈까? 뭐 먹고 싶어?”
모난 내 행동에 대해 언급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빤히 아는 재형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의 ‘무조건 회피’ 전법이다. 나는 조금 더 위악을 떨어볼까 하다가 자신을 억눌렀다. 오늘은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 빙빙 돌지 말고 얼른 해치우자.
“밥 말고, 우리 저기 공원에 갈까? 나 할 말 있는데.”
나는 출입국사무소 건너편에 있는 공원을 가리켰다.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는 제법 큰 공원이었다. 재형은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겁먹은 표정으로 부지런히 나를 따라왔다.
“뭔데? 할 말 있다니까 되게 무섭다. 헤어지자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뭔 일 있는 거면 무조건 내가 잘못했어. 여경아, 나 버리지 마라.”
분수대 앞 벤치에 앉자마자 재형이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실은 며칠 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말 못 했어. 꽤 오래 고민하다 얘기하는 거니까 진지하게 들어주면 좋겠다.”
재형이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재형의 시선을 피해 분수대를 쳐다보았다. 한여름에만 작동되는 한산한 분수대 안에 우유곽과 음료수 병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있잖아…….”
운을 뗐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뭔데 그렇게 말을 못 해? 그냥 마음 편하게…….”
“우리 집, 사실은 우리 집 아니야. 전세야.”
내가 불쑥,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분수대 건너편에서 통화를 하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밀고 쳐다볼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동안 말 안 해서 미안해. 속이려 했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말할 기회를 놓쳤어. 어쨌든 속인 거나 마찬가지란 거 인정해. 미안하다.”
국어책을 읽듯 속사포처럼 말했다. 말하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이 문제로 엄청나게 고심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고, 시원해라.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공은 재형에게 넘어갔다. 이 얘길 듣고도 날 계속 사랑하든, 거짓말쟁이라고 차버리든, 난 알 바 아니다.
재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발로 벤치 밑의 잔디를 짓이겼다. 이 자식이 왜 대답을 안 하지? 너무 충격을 먹었나? 한동안 기다리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재형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 내 얘기 못 들었어?”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내 입에서 과장되게 단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사람이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재형은 넋 나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여경아, 실은 나도 할 말이 있어.”
“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도……할 말이 있다고?
“실은…….”
재형은 발을 떨면서 울리지도 않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얼른 말 해. 발 좀 떨지 말고!”
네가 얘기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고 이해해주겠다는 포근한 반응을 보였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갔다. 재형은 입을 꾹 다물고 더 심하게 발을 떨었다.
“빨리 말 해. 안 그럼 나 간다!”
마음과 다르게 자꾸 짜증을 내게 됐다. 대체 뭔데? 뭔데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거야?
“실은……나…… A사 정직원 아니야. 계약직이야. 너랑 처음 만났을 땐 정규직으로 발령내주기로 회사랑 약속이 된 상태였어. 그래서 그냥 정직원 아니라고 말 안 한 거야. 어차피 육개월 뒤면 정직원 될 거였으니까. 근데 회사에서 약속을 어기고 소속 회사를 바꿔서 2년 연장 계약을 했어. 진즉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하게 됐다. 속이려 했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말할 기회를 놓쳤어.”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속사포가 날아왔다. 하. 나는 입을 벌린 상태로 코웃음을 쳤다. 이건……완전 반전인데? 뭐라고 해야 하지? 그때 재형이 이차로 속사포를 날렸다.
“또 있어. 우리 엄마, 실은 대학교 교직원이 아니고……학교에서 청소하셔.”
“뭐?”
나는 일어서서 재형의 앞에 섰다. 이건 반전이 아니라……코메디 아닌가? 지금 얘가 뭐라고 한 거지?
“J대학 총무과 직원이……아니셨어?”
재형은 B대학 컴퓨터공학과를 나와 A사를 다니고 있는, 남편과 일찍 사별한 뒤 평생 동안 J대학교 교직원으로 근무해온 성실한 50대 여인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게……아니라고? 그럼 아사히는? 스타벅스 더블샷은? 그 취향도 가짜였나?
“J대학 다니시는 건 맞는데, 용역업체에서 파견된 미화원이야. 나처럼.”
재형은 정직원과 파견직 간의 차이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하는 일은 비슷하다, 다만 소속이 다를 뿐이다, 사년 이상 근무하면 회사에서 정직원으로 고용해주기로 했으니 사실상 정직원이나 다름없다. 엄마도 원래 무역회사 경리였는데 아이엠에프가 터지면서 명예퇴직을 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재형의 입모양을 바라보았다. 아이엠에프, 명예퇴직, 파견직, 정직원, 마찬가지, 잘만 하면……구질구질한 말들이 반복해서 튀어나왔다.
“너네 집, 그건 너네 거 맞니?”
난폭하게 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림의 정중앙에 서 있던 인물 둘이 가상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 인물들이 서 있던 공간, 즉 마포의 삼십 평짜리 낡은 아파트는 실존할까?
“그럼. 그건 당연히 우리 집이지.”
대답하는 속도나 어조로 보아, 그 집은 재형이네 소유가 맞는 것 같았다.
“정말?”
믿을 수가 없다. 그 동안 이 자식이 날 깡그리 속여온 것 아닌가. 저 축 쳐진 눈매를 하고. 죽으면 죽었지 거짓말 같은 건 절대로 못 할 것 같은 저 착한 눈매를 하고.
“야. 너 나 그렇게 못 믿어?”
나는 얼굴을 들이밀고 재형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 누구지? 갑자기 재형의 얼굴이 낯설어보였다. 나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축 쳐진 눈매 속에 들어 있는 재형의 검은 눈동자에서 간교한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착한 사슴의 눈 같다고 생각했던 그 검은 눈동자에서.
* 1월 22일 마지막 회를 기대해 주세요. (블로그 운영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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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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