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ast Africa Story '08

endofpacific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8.4.18
[출처] 탄자니아 지도
오늘날 탄자니아 공화국은 탕가니카라 불렸던 내륙과 인도양의 잔지바 군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잔지바는 ‘향신료 섬’이라 불리면서, 이미 12세기 무렵부터 아랍과 페르시아만 사이를 잇는 교역지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저 멀리 인도와 아시아에까지 노예와 상아, 목재와 황금을 공급하였고 향신료와 유리 그릇, 옷감 등을 수입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 무렵 이슬람 문화도 함께 유입되어 오늘날까지도 군도의 건축물과 생활 면면이 이슬람 문화에 기초하게 된다. 16세기, 이 알짜배기 교역지가 포르투갈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황금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1963년 독립할 때까지 순서대로 오만과 영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달에살람에서 70km. 한 시간 반 뒤면 잔지바에 닿을 것이다. 크레이그가 선실로 들어오며 “나가봐요. 정말 좋아요.” 하자, 아이가 총알같이 튀어나갔다. 나는 아이와 선미의 갑판에 섰다. 잿빛 하늘 가운데 검은 구름이 떠다니고 파도는 거세다. 모자를 움켜쥐어야 하는 바람을 타고 때때로 커다란 파도의 포말이 시원스럽게 우리를 덮친다. 아이는 이제 들어갈 생각을 않고 갑판의 보호대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끼악 끼악 소리를 질러댄다.
갑판은 온갖 짐꾸러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용케 빈 자리를 찾아내 망설임 없이 누워 있다. 정장을 잘 차려 입은 사람까지도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좁은 공간에 빼곡히 눕다 보니, 누군가의 얼굴에 누군가의 발이 닿기도 한다. 뱃멀미를 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얼굴 옆에서 비닐에 토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들은 불쾌해하지 않는다. 그저 좁은 공간에 여럿이 눕다 보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경계가 없다. 이렇게 시끄러운 기관실 옆에서 물보라를 뒤집어쓰면서도 곤히 자다니, 꿈과 현실 사이에도 경계가 없다. 이처럼 순하고 욕심 없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유럽인들은 어찌 ‘착취하기 딱 좋겠다!’는 쾌재를 먼저 불렀을까. 오래 전 노예들을 가득 실은 배가 느리고 무겁게 지나갔을 그 길을 우리는 오늘 새하얀 현대식 페리를 타고 간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가 팔려나가는 것은 아프리카의 역사가 기록되던 첫 순간부터 이미 진행형이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특히 이슬람 문화가 팽창하던 시기에 노예무역도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슬람교가 무슬림을 노예화 하는 것을 금하였기에, 아프리카인들은 졸지에 <비무슬림>이 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이후 설탕에 맛을 들인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 설탕을 재배하면서, 아프리카인들은 또 졸지에 잡아가도 좋은 <이교도>가 되어버렸다.
노예들은 일인당 폭 40cm의 비좁은 공간에 쇠사슬로 채워진 채 짐짝처럼 적재되어 최대 몇 달씩 걸리는 항해를 해야 했다고 한다. 당연히 항해 중에 다수가 죽었고 또 길들여지는 가운데 다수가 죽었다. 특히 카리브해에 팔려온 노예의 수명은 평균 7년에 불과하였다고 하니, 농장주의 높은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프리카에서의 인간사냥은 더욱 악랄해질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절정에 이른 노예무역은 유럽에 달콤한 설탕을 가져다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착실히 중상주의 정책을 펴며 달콤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어 주었다. 유럽의 교회와 정부는 자신들의 행위가 “이교도 야만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18세기 후반부터 천천히 싹을 틔우기 시작한 <인도주의>는 짭짤한 이익을 보던 상인과 정치가들에 의해 계속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과 함께 사실상 노예 무역이 폐지되었다.
The Slave Market, Zanzibar
동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잔지바의 악명 높은 ‘노예시장’에서는 한 해 5만 명의 노예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탄자니아 내륙에서는 고유한 <종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부족사회가 무자비한 노예상인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군대> 중심으로 개편되었으며, 이웃부족까지 가리지 않고 노예사냥이 자행되자 부족 간에 내전이 급증하였다…
요컨대, 주워들은 것도 많았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했지만 그만큼 할 일도 많았던 큰집에서, 밤낮 오두막 언저리에서 기도나 하고 춤이나 추는 이웃집이 한심해 그들을 잡아다 “너희도 인간답게 살아 봐” 하고 죽을 때까지 일을 시켰던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고 또 다양해야 하겠지만, 무지와 탐욕으로 가득한 역사의 참혹한 장章이 빚어낸 가난과 전쟁이 오늘날까지도 멈추지 않고 대물림 되는 아프리카의 현실 앞에서, 과연 타당한 이견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나는 회의가 든다.
아이가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파도의 리듬에 맞춰 소리지르기를 멈춘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데 두 눈에 졸음이 가득 들었다. 아이는 누워 자는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조심조심 건너서, 어렵사리 엉덩이 붙일 자리를 찾은 내 곁으로 온다.
On the Ferry to Zanzibar
잿빛 하늘 아래, 수천 겹의 거센 물결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문득, 저 가운데 유독 큰 파도가 해일처럼 한번 용솟음치면 이까짓 페리 한 척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배에 승선한 모든 이들의 삶과 그 삶에 담긴 애환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지난 겨우내 나의 발목을 붙잡았던 삶의 소요들은, 실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이었던가. 우리가 힘들 때 바다로 달려가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바다의 거대함 앞에 우리의 고통을 내려놓고 그 견주어진 미미함으로부터 위로 받기 위해서 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작고 약한 존재들이다. 역사의 어느 지점에 어떤 모양새로 운명이 우리를 안착시키는가에 따라 처절히 다른 생을 산다. 그러므로 우리가 노예선이 아닌 페리로 바다를 건너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역사 상의 다른 이들보다 안락함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다음에 올 세대를 위해, 그들에게 닥칠 지 모를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방패가 되기 위해 현재 주어진 생에서 노력해야 한다…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아이가 내 무릎에 머리를 놓고 웅크린다. 그리고 갑판을 기어 다니던 바퀴벌레를 잡아 잠시 손안에서 가지고 놀다가 이내 잠이 들고 만다. 물보라가 수시로 덮치고 엄청난 소음이 멈추지 않는 기관실 곁, 도저히 잠들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과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