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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09.1.13

지난 <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전>에 대한 글에서 피사로의 작품세계와 인상파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한 바 있다. 이 글은 인상파의 태동을 알린 모네의 그림을 통해 위 글에서 약속한 바 있는 인상파의 회화 기법인 ‘색채 분할’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오늘의 주제를 위한 그림은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이다.
근대의 거장들 가운데 모네만큼 빛을 동경한 화가도 드물다. 뿌연 아침 안개 속에 오렌지색의 빛을 떨구는 바다, 여름 초원에 불타는 햇빛의 그림자, 세느강 수면에서 춤추는 빛, 짚더미 속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빛, 수련 꽃잎에서 탄식하는 빛... 모네는 평생 동안 천변만화하는 빛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의 거리에서 부댕의 지도로 화가가 되고자 결심한 이래 모네의 화업은 대부분 빛에 바쳐진 찬가라 할 수 있다.
흰옷을 입고 양산을 쓰고 있는 젊은 여성을 그린 이 작품에서도 화면 구석구석까지 밝은 빛이 넘쳐난다. 그것은 열어놓은 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와 샹들리에나 탁자 위의 정물에 고요하게 내려앉는 베르메르(17세기 네덜란드 화가로 정확한 원근법적 구도와 빛에 의한 시각효과를 완벽에 가깝게 그린 화가)의 빛이 아니라 훨씬 자유분방하게 퍼지고 반사하면서 세계 전체를 흠뻑 적시는 홍수와 같은 빛이다.
흰 구름이 뜬 하늘은 바닥을 알 수 없는 빛의 바다처럼 멀리 펼쳐져 있고 양산을 쓴 여자의 희고 풍성한 옷자락과 모자를 묶은 푸른 스카프는 바람에 날리면서 풀밭 위에 경쾌하게 서있다. 작품을 대하는 우리는 실제로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곳에 서서 상쾌한 빛과 밝은 공기를 호흡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빛과 공기만이 아니라 풀밭을 건너오는 바람의 기분 좋은 촉감이나 그 바람이 실어 오는 싱그런 여름 낮의 향기까지 느껴진다. 관객 자신이 바로 일 드 프랑스의 들판에 화가와 함께 서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주는 그 생생한 현실감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실제로 야외에서, 즉 현장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에서 온다. 어두침침한 아틀리에를 벗어나 야외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모습을 포착하여 화폭에 담는 것으로부터 인상파는 탄생했다. 물론 바르비종파 등 야외에서 작업한 화가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다만 1870년대의 젊은 화가들은 태양빛으로 차고 넘치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였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르아브르 항구나 아르장퇴유의 거리에서 모네 등 일군의 화가들이 발견한 것은 자연은 태양빛의 작용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종래의 회화관에 따르면 자연 속에 존재하는 사물은 모두 각각 고유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풀은 녹색이고 하늘은 파란색이었다. 다만 그 녹색이나 파랑이 때에 따라 명암의 변화를 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즉 밝기의 차이는 있어도 같은 사물은 언제나 같은 색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모네를 비롯한 미래의 인상주의 그룹은 자연의 사물들이 고유의 색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초록의 풀이 때로는 석양빛의 반사를 받아 붉게 빛나기도 하고 파란 옷 위에 오렌지색 햇살이 흐르기도 한다. 푸른 풀밭이 햇빛에 의해 하얗게 빛나기도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빛의 작용인데, 그들은 빛의 작용을 망설임 없이 색의 세계로 바꿔놓았다.

가령, 오늘 보는 그림에서 여주인공은 흰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런데 그 드레스에 파란 하늘이나 붉은 들꽃의 빛이 미묘하게 비치고 있다. 그래서 모네는 흰옷 위에 옅은 파랑이나 분홍의 터치를 더했다. 흰옷은 어디까지나 희다고 믿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그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옆에서 보는 <햇빛 속의 나부>에서 르누아르가 피부 위에 떨어지는 빛의 반점을 표현했을 때 이를 이해하지 못한 한 비평가는 “시반(屍班)이 생겨난 시체와 같은 몸뚱이”라며 비난했다는 웃지 못 할 일화도 전해진다.
- 색채분할
인상파 화가들이 작품에 그린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눈에 비친 자연의 모습이다. 대상의 고유한 색채를 부정하고 눈에 비치는 대로 빛나는 자연을 그리려 했던 인상파 화가들은, 그것을 위해 그때까지 없던 특수한 기법을 발명한다. 그것은 가느다란 풀잎의 뒷면이나 옷의 주름 구석까지 비쳐드는 태양빛의 반짝임을 재현하려는 것과, 그 미묘한 빛의 색뿐만 아니라 그 밝은 광채까지 표현하려는 두 개의 야망을 동시에 달성시켜주는 기법이었다.
햇빛의 반짝임을 그대로 화면에 붙잡아 두려면 태양빛의 색으로 그려야 한다. 얼른 보기에 백색광으로 보이는 태양빛이, 사실은 무지개의 일곱 색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광학이론의 발달은 그 현상을 한층 더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따라서 인상파 화가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일곱 색을 써서 그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것은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그 삼원색을 각각 두 가지씩 섞었을 때 생겨나는 주황, 보라, 초록의 1차 혼합색을 중심으로 하여 어두운 색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상파의 첫 번째 원칙은 원색주의다. 두 번째 원칙은 그러한 섞이지 않은 색채들을 가능한 순수한 채로, 즉 서로 섞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다. 종래의 회화기법은 중간색을 내기 위해 여러 종류의 물감을 섞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인상파 화가들은 물감을 섞으면 밝기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밝은 빛을 가진 무지개의 일곱 색을 차례차례 섞다보면 점점 어두워져 마침내는 검정이 되고 만다. 즉 밝게 빛나는 자연과는 역방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간색을 표현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인상파 그룹은 그 문제에 대하여, 섞어야 할 색을 따로따로 작은 터치로 화면에 병렬하면 중간색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해결법을 생각해냈다. 그렇게 하면, 작고 미세한 붓질이기 때문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개개의 터치는 보이지 않고 전체가 하나로 섞여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색조 하나하나가 따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밝기는 유지된다. 물감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물감에서 나오는 빛이 눈 속에서 섞이는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것을 ‘시각 혼합’ 또는 ‘망막상의 혼합’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 시각 혼합을 가져오는 기법이 이른바 ‘색채 분할’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양산을 쓴 여인>에서 아래쪽 풀밭의 묘사는 색채 분할의 좋은 예다. 여러 가지 색의 터치가 그대로 화면에 병렬되어 있다. 그림자 부분에 조차 녹색과 빨강의 터치가 아주 분방하게 배열되어 있음으로 해서 여름의 풀밭이 덥게 느껴질 정도로 다채로운 빛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밝기가 유지되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미세하게 그어진 작은 붓질 때문에 습한 기운은 사라지고 풀 사이로 스며드는 시원한 바람을 우리는 느낀다.
색채 분할 또한 회화 기법의 하나다. 화폭에 흩어진 무수한 터치는 자연의 환영을 주기는 하지만 자연 그 자체는 아니다. 바로 화가의 눈에 비친 허구의 자연일 뿐이다. 이 <양산을 쓴 여자>는 인상파 최후의 그룹전이 열린 1886년에 그려졌는데, 이 무렵부터 모네의 세계는 세세한 붓질로 표현되는 빛의 홍수 속으로 빠져든다. 수련 연작에서 보듯이 이 때 이후로 명확한 형태 파악이 필요한 인물상은 모네의 화면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족>>모네의 그림 중 오늘처럼 눈 내리는 겨울 풍경을 그린 그림들과 빛의 작용에 의한 색조의 변화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건초더미> 연작, 그리고 모네하면 떠오르는 수련 그림 몇 점을 눈요기로 올리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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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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