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고...

eunbi
- 작성일
- 2018.12.14
삼귀
- 글쓴이
- 미야베 미유키 저
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가 글을 잘 쓴다는 건 알았지만... 이번에 읽은 삼귀(三鬼)는 정말 대단하다. 별 기대하지 않고 킬 타임용으로 읽었는데 의외로 쫄깃한 재미와 함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일본 에도 시대(1603~1867 도쿠가와 시대)를 배경으로 무섭고도 기이한 귀신(원귀, 요괴) 이야기가 주는 흥미로움에 더하여, 밑바닥에 깔린 서정적인 풍경이 꽤 사실적이고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 또한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잘 스며들어 우리 마음속에 웅크린 '어둠'을 살짝 짚어보게 한다. 이 모노가타리(物語)는 아마도, 작가의 역.대.급.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에도(지금의 도쿄) 간다(神田), 스지카이고몬 앞의 한 모퉁이에 있는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三島屋). 이곳 '흑백의 방'이라 이름 붙인 객실에 한 번에 한 명의 이야기꾼을 불러서 신기한 이야기나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특이한 방식의 괴담 자리가 마련된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이 집 주인의 조카딸인 '오치카 おちか'. 아름답고 사려 깊은 그녀는 이야기꾼의 괴담을 들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야길 매끄럽게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놓은 사람들은 평온을 얻는다. 귀신이란 매개체를 통해 흑과 백 사이의 기묘하며 애달픈 4편의 이야기가 그렇게 펼쳐진다.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것은 때로 인생의 한 귀퉁이에 스며들어 떨어지지 않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니 아무래도 많은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건 곤란하다. 다만 한 번쯤 입 밖으로 내어 토해 버리고 싶을 뿐이다. 무덤까지 그대로 가져가기는 괴로우니까. 그 무언가가 비석 밑에 다 들어가지 않을까 봐 불안하니까.
그래서 미시마야의 특이한 괴담 자리에는 사람이 모인다.
어려운 규칙은 없다. 듣고 잊어버리고, 말하고 잊어버리고, 그것뿐이다.
오늘도 또 한 사람, 흑백의 방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다.(10~11쪽)
○1편: 미망의 여관 迷いの旅籠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는 일본판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빛의 숲'이라는 곳에 있는 고모리 신사의 아카리 신! 겨울 동안 잠들어 있던 논의 신을 깨우기 위한 '초롱 축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이다. 처음엔 좀 시니컬하게 읽어나겠는데 곧 소설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내와 아이를 잃은 화가는 "어떻게 하면 죽은 사람이 저세상에서 돌아와 내 그림에 깃들고 생생하게 되살아나 줄까." 연구하다가 실제로 이세상과 저세상이 통하는 길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죽은 사람이 한명 돌아오면 마을의 산 사람이 한 명 생기를 잃어버린다는... 돌아온 망자와 살아있는 자의 연(緣)이 애닲다.
"오늘밤에 별채에 불이 켜지고 건물 전체가 초롱보다도 밝고 아름답게 빛나면 그게 길잡이가 될 거야."
저 세상에서 이세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길잡이.
"이 마을과 인연이 있는 죽은 자들이, 이곳에서 친근하게 살아갔던 사람들이 모두 별채로 돌아올 게다."
선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길잡이가 생기고 길이 열리겠지. 별채는 되살아난 죽은 자들이 쉴 곳이 될 거야. 마치 여관 같은 것이지." (131쪽)
○2편: 식객 히다루가미 食客ひだる神
평판이 좋은 도시락 가게 다루마야는 특이하게도 매년 벚꽃놀이 시기가 지나면 가을 단풍철이 될 때까지 가게를 닫아 버린다. 그 이유는 주인장에게 들러붙은 먹보귀신 히다루가미 때문이다. '아귀'라고도 부르는 히다루가미는 산길이나 들길에서 쓰려져 죽은 사람의 영혼이며 요괴이다. 이것에 씌면 갑자기 심한 공복을 느끼고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단다. 이 귀신이 음식 가게 주인에게 붙은 만큼 잘 먹게 되는 것까진 좋았는데, 그만 방구들이 내려앉을 만큼의 뚱보 귀신이 되고 말았다는 게 문제다. 일본 요리에 대한 섬세한 표현이 멋들어지고, 4편 중에 가장 코믹하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북쪽의 어느 지방에서는 벚꽃이 피었을 때만 장례를 치른대요."
물론 죽은 사람은 그때그때 묻지만 장례 의식은 벚꽃이 피는 시기에 다 같이 한다는 뜻이다.
"벚꽃은 원래 극락에 피는 꽃인데 활짝 핀 벚나무가 길을 헤매지 않도록 정토로 통해 있기 때문이래요." (223쪽)
○3편: 삼귀 三鬼(미키)
표제작인 이 소설은 섬뜩하면서도 아주 인상적이다. 특히 마무리의 반전은 '이거 뭐지?'라는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누이를 겁탈한 상층부 자식들과 3:1 정정당당 대결에서 한 명을 베어 죽인 무라이! 그 벌로 산세 험하고 기후 혹독하며 고립된 산촌의 산지기로 가게 되는데, 삼년을 일하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다면 가문을 다시 일으켜 주고 원래 일자리로 재발탁한다는 이례적인 처분을 받는다. 그만큼 마을의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오니! 일본인에게 무섭고 강하며 냉정한 존재로 알려져 있는 이 산속 귀신이 주인공이다. 아.니.다! 더 밝힐 수 없는 결말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정말 읽을 만하다.
너는, 나다.
"그것은 구리야마 번에 있던 모든 부조리, 모든 업, 모든 슬픔이 뭉쳐진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다.
"내가 시즈를 위해 사람을 벤 것처럼 그것도 호리가모리 마을을 위해 사람들을 죽여 왔지요."
너와 나는 동포다.
그래서 세이자에몬은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고함치고 싶었다. (477쪽)
질척거리는 길에 크게 한 발 내딛은 바로 그때였다. 비 맞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삿갓 가장자리를 들어올리고 세이자에몬은 빗발 사이를 응시했다.
긴키치의 오두막 갈대발 옆에 이상한 것이 서 있었다.
-누구지.
순간 그렇게 생각한 까닭은 도롱이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삿갓이 아니라 통 모양의 바구니를 쓰고 있었다. 숯을 칠한 것처럼 새까만 바구니다. 그래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키는 세이자에몬보다는 작다. 도롱이가 복사뼈 위까지 내려왔다.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계절에 맞지 않는 눈신이었다. (422~423쪽)
○4편: 오쿠라 님 おくらさま
오치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네. 강도가 들었을 때 도와준 습자소 '진코 학원'의 작은 선생이었구나. 이 '오쿠라 님'은 오치카의 불행한 과거 사건과 중의적으로 그려진다(빨리 읽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 이 년 전 오치카는 약혼자를 잃었다. 약혼자를 해친 이는 오치카의 본가에서 '주워서 키워 준' 고아였다. 질투와 시기, 열등감, 은혜와 원한이 얽히면서 일어난 사고였으며 오치카는 마음속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어느 날 유체이탈로 찾아 온 노파 이야기꾼을 만나 향료가게의 비밀스런 여자 신 '오쿠라 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비극이다. 저주와 은혜의 줄타기이다. 혼만 빠져나와 이야기를 전해야만 했던 아픔...
화재나 지진, 돌림병이나 강도 등 비센야의 재산이나 가족의 목숨을 상하게 할 만한 변고가 일어났을 때, 주인이 부탁하면 곳간방에서 나와 사람들을 지켜 준다.
대신, 그 대의 오쿠라 님의 역할은 거기에서 끝난다. 오쿠라 님은 대가 바뀌게 된다.
다음 오쿠라 님으로는 오쿠라 님이 지켜 준 비센야의 딸 중 누군가 한 명이 선택된다.
"오쿠라 님이 된 딸은 이 세상의 삶을 살지 않게 돼요.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니까요."
음식도 필요 없다. 물도 필요 없다. 시간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가 나이도 먹지 않는다. 영원한 처녀가 된다.
상향반의 향기에 감싸여. (542쪽)
○에필로그: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미미 여사! 대단하다. 일본판 이 '전설의 고향'에는 인간의 염(念)과 원(怨)이 담겨 있었다. 귀신을 통해 인간을 읽는 소설인 것이다. 일본 문화 특유의 순응주의 속에서도 감성과 서정이 작가의 필력으로 아름답게 살아난다. 애환 속에 따스함이 있고 고뇌 속에 애정이 물결친다. 그럼으로써 별 볼일 없는 B급 내용에 문학적, 철학적 가치가 더해진 것이다.
햐쿠모노가타리(百物語·ひゃくものがたり)란 전통 놀이가 있는 모양인데, 밤에 사람들이 모여 100개의 촛불을 켠 뒤 한 사람씩 돌아가며 괴담 등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그때마다 하나씩 끈다. 속설에는 100번째 촛불이 꺼지면 요괴가 나타나거나 마지막 얘기를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의 작가라면 이 모노가타리에 한 번쯤 도전해본다고 한다. 미미여사도 이 햐쿠모노가타리에 도전하여 시리즈물을 계속 출간하고 있으니 다음 작품 또한 기대가 크다. 잘 읽었다.
유키미 장지를 한 장만 연다. 가을 색으로 물든 정원의 풍경이 흑백의 방에 색채를 더한다. 오치카는 책상 앞에 앉아 후리소데에서 팔꿈치를 내놓고 양손으로 빰을 괴었다.
마음이 고요하다.
눈을 감아 보았다. 가을바람이 정원의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
가을바람에 또 정원의 나무가 술렁거린다. 선명한 단풍잎 한 장이 팔락하고 떨어져 내려왔다.
...
미시마야의 특이한 괴담 자리에서 한 사람이 떠나고, 한 사람이 더해진, 기분 좋은 가을날의 일이었다.(645~651쪽)
덧붙임.
표지는 띠지를 입힌 일본 출간물이 더 내용을 잘 설명하고 있는 거 같다. 너무 왜색이라 바꾼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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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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