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고...

eunbi
- 작성일
- 2022.10.3
목련꽃 편지
- 글쓴이
- 한희정 저
한그루
이번 제주도 여정에 가볍고 얇은 책 한 권을 가지고 갔습니다.
제주 서귀포 출신이며, 현재 제주시조시인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인 한희정 님의 '목련꽃 편지' 입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많이 걷는 일정이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으리라는 생각도 있었고
'제주'라는 테마에 잘 어울릴 거라 보고 가져간 시조시집입니다.
저는 시적 언어 감각이나 감상력이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대신 음률이나 운율에는 나름의 공감대가 잘 이루어지는 편인지라 시보다는 시조가 잘 와닿습니다.
한 시인의 시는 어렵지도 않으면서 지역 특유의 감각이 잘 살아나는 글이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흐름에서 깊은 내공을 엿보았습니다.
아래 '노래처럼 전설처럼'을 읊은 다음 날 영실-돈네코 탐방길을 걸었습니다.
매표소까지 가는 길에 보이는 설문대할망과, 윗세오름길의 오백나한이 더욱 정감 있게 와 닿았습니다.
노래처럼 전설처럼
숨 가쁘게 살았어도 내력은 푸르러라 / 담담히 풀어내는, 가슴속 숨겼던 말 / 담쟁이 뒤틀린 마디에 푸른 혈관 보이네
몇 겁을 돌고 돌아 새 옷 한 벌 입으셨나 / 아쉬운 명주 한 필 구름으로 감아 놓고 / 오늘도 오백나한에 두 손 꼭꼭 모으며
제주 땅에 산다는 건 뿌리를 내리는 거 / 구멍 난 치마폭으로 섬에다 섬을 얹으며 / 긴 여정 설문대할망이 맨발로 와 계시다
이틀만 더 있었으면 가봤을 곳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 오름...
숙소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 곳인데... 왕이메 오름은 다음에 꼭 가봐야겠습니다….
신들의 고향
왕이메 분화구에 일만 팔천 신이 산다 / 우수에 닦아 놓은 흰 고깔 쓰고 앉아 / 잡목 숲 장막 걷으며 봄을 깨우고 있더라
낮아서 더 환하고 작아서 더 빛나는 / 살얼음빛 표정 앞에 무릎 꿇은 방문객들 / 카메라 셔터소리도 차마 내지 못하더라
일만 팔천 마음이면 하늘도 감복이라 / 솔바람 한 줄에다 꽃풀이 풀어 놓는, / 고수레, 생감주 한잔에 바람꽃이 피더라
표제작을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은 그대로 실어보겠습니다. 목련과 초승달이 어우러지는 봄밤이 아름다운 시입니다.
목련꽃 편지
인편도 우편도 아닌, 홀연히 온 봄소식
늦잠결 초인종 소리, 눈 비비며 찾아온
앞마당
목련나무가
편지 한 장 들고서
바람결 사십 년 전 편지 한 통 따라 왔네
무심코 연 팔레트에 열두 색깔 꽃이 피듯
아버지
한 글자 한 글자
몽글몽글 꽃이었지
외로움이 깊을수록 꽃은 더욱 환했네
자취방 창호 문에 우련 비친 섬 하나
초승달
꽃 이파리에다
안부 묻던 그 봄밤
이외에도 문자의 배치나 의념의 배치 등 시적 기교가 돋보이는 시가 더러 있었습니다.
제주라는 전설과 신화의 땅에 잘 어울리는, 마치 제주 바다 같은, 그런 느낌의 시집이었습니다.
<약력>
- 2005년 《시조21》 등단.
- 시조집 『굿모닝 강아지풀』, 『꽃을 줍는 13월』, 『그래 지금은 사랑이야』.
- 현대시조100인시조선집 『도시의 가을 한 잎』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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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