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고...

eunbi
- 작성일
- 2017.11.3
녹스머신
- 글쓴이
- 노리즈키 린타로 저
반니
미스터리 소설을 읽고 이렇게 고민하기도 처음인 듯하다. 재미있거나, 재미없거나 둘 중 하나인 장르소설이건만 이번에 읽은 <녹스 머신>은 기존 미스터리 소설_일반적으로 추리소설_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름 미스터리 추리소설 마니아지만 이 책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 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잘나가는 '일본 미스터리 문학의 힘'이 느껴지는 대단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고, 뭔 이따위 책에 2014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이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 이런 타이틀을……. 일본X들 돌았나? 이런 2개의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에라~ 2개의 관점에서 서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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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소설 대단하다.
일본 미스터리, 특히 추리소설의 다양성은 정말 인정해 줘야겠다.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저변이 넓다는 것이니 일천한 우리 추리계의 현실을 떠올려보면 그저 부럽기만 하다. 본격 추리에서 사회파 추리로 발전하는가 싶더니 신본격 추리로 진화하고, 요즘은 어떤 형식이나 정의가 허물어지고 다양한 성격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말랑말랑한 코지 미스터리, 만화적 상상력이 넘쳐나는 라이트 노블, 요상한 괴기문화의 심령추리, 일본스런 잔혹한 하드보일드 추리, 서정성을 가미한 추리... 정말 영역에 한계가 없더라. 그런데 이번엔 SF추리이다. 그것도 수준 높은...
<녹스 머신>! 이 책은 표지의 색상이나 일러스트가 깔끔하여 시선을 끈다. 그리고 "굉장한 소설이다! 이 한마디밖엔……!", "2014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란 띠지의 카피 문구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본격 미스터리와 본격 SF, 두 장르의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의 탄생!" 이란 찬사를 접하고 보니 손에 안 잡을 수가 없더라. (참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은 다른 상이다. 전자는 순위 투표 형식으로 선정되는데 비해, 후자는 신인작가 발굴을 위한 공모전임)
4개의 소설_녹스 머신, 들러리 클럽의 음모, 바벨의 감옥, 논리 증발(녹스 머신 2)_이 수록되어 있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지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표제작인 <녹스 머신>은 추리소설 작가 로널드 녹스(Ronald Arbuthnott Knox, 1888-1957)가 발표한 '미스터리를 쓸 때 지켜야하는 사항', 즉 탐정소설의 기본 규칙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녹스의 10계(Knox's Ten Commandments)'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실제로 녹스의 10계 중 제5항은 "탐정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_No Chinaman must figure in the story._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규칙을 모티브로 하여 정말로 기발하고 재기 넘치는 미스터리 소재를 잡아낸 것이다. 과거를 넘나드는 SF와 녹스 작법과의 조우가 꽤 흥미롭다.
마지막 편 <논리증발 _ 녹스 머신 2>는 일종의 속편(sequel)이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지 그저 놀랍다. 양자화된 텍스트가 대생성과 대소멸을 반복하면서 전자적으로 재현된 초소형 블랙홀이 '유사 호킹 방사'에 의해 엄청난 열을 방출함으로써 웹상에 있는 모든 데이터를 태워버린다는 발상 자체가 무지 참신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허수의 신체를 가진, 즉 데이터로 변환한 가상의 유안(No Chinaman)이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 <아바타>와 <매트릭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가 되더라. 작품의 주요 소재로 엘러리 퀸의 추리소설 <국명 시리즈>가 활용되는데, 내 자신도 이 시리즈를 읽었지만 작가의 엘러리 퀸 작품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너무나 깊이가 있고 예리하였다. 난 <녹스 머신 2>가 전편에 비해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전편의 이해가 훨씬 나아지더라.
<들러리 클럽의 음모>도 위트가 넘치는 작품이다. 고전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탐정들의 조수_셜록 홈스의 왓슨 박사, 에르큘 포와로의 헤이스팅스 대위, 파일로 밴스의 밴 다인 등_들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이들 들러리들은 나중에 세계 3대 추리소설의 하나로 평가받게 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에 불만이 많은 상태다. 이 소설엔 기막힌 추리로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명탐정도, 그를 보좌하는 들러리 이야기꾼도 없이 사건의 전말을 범인의 고백으로 마무리해 버린다. 그러니 명탐정과 그 조수의 파트너십을 중시해 온 꼰대 들러리들이 난리 난거지. 애거서가 탐정소설의 규칙과 형식을 깨부숨으로써 그들의 자리가 없어진다는 거다. 발상의 신선함이 머리를 상쾌하게 한다.
<바벨의 감옥>은 일본어 세로쓰기에 맞춘 트릭의 작품이다. 조금 난해한 듯하지만 천천히 읽어보면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에 압도되고 만다. 사이클로프스인의 정신파동 스캐닝_마인드 리딩_은 지구인의 자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니 지구인은 언제나 열세였는데, 그 메커니즘을 알아내고 난 뒤 방어용 수단으로 경상_鏡像 거울에 비친 상_ 인격을 만들어 낸다. 주인공은 지구인 공작원으로 활동 중 사로잡혀 의식이 '순수한 데이터 인격'으로 변환되어 거의 두께가 없는 네모 모양의 공간_모노 스페이스_에 갇히게 된다. 의식의 탈출을 다루는 소설인데 그 수준이 장난 아니다. 읽는 동안, 거울에 비친 환영을 자신으로 동일시 한 자아상(환상)과 실제의 차이를 통해 존재론적 간극을 다루는 라캉의 욕망이론이 오버랩 되더라. 대단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 <녹스 머신>은 이처럼 남다른 상상력과 작가의 추리소설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만들어 낸 수준 높은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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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뿔~ 이거 추리 맞아? 이런 소설이 1위?
아이고~ 수준 높은 작품이면 뭣하나. 이런 장르소설은 무릇 사건과 캐릭터에 몰입되어 주욱~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어야 제 맛이지. 고급 수준의 단어를 난해함으로 이리저리 꼬아 놓으면 이거 어쩌자는 거야. 추리 소설? 미스터리 소설? 도대체 뭐가 미스터리한 거지? 이건 추리소설 작가가 추리소설을 모티브로 SF 요소를 섞은 짬뽕 소설이지. 범주가 애매하잖아. 이 소설을 한 방에 시원스럽게 읽었다고 주장하는 독자가 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이 난무하지만 추리 소설은 아니고, 그러니 추리 본연의 맛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런 소설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이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라고? 일본X들 허세 쩌네. 요새 그 동네 경제가 좋지 않아 우익으로 내달리더만 머릿속이 경도되었나.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도 우리보다 많이 안보는 족속들이 이해는 했을까. 하긴 우리보다 과학이 앞선 건 인정한다만... 혹시 일본 독자들도 펑펑 찍어내다시피 하는 미스터리 추리소설에 이제 식상한 거 아냐? 그러니까 이런 책을 읽고 싶다고 하지.
<녹스 머신>,<논리증발 _ 녹스 머신 2> 읽다가 머리 터져 죽을 뻔 했다. 컴퓨터가 추리문학을 생성해낸다는 '오토포에틱스'나 녹스의 'No Chinaman'에 주목한 것은 대단한 상상력이지만, 작품 속에 인용되는 추리소설들을 대부분 읽은 내 자신도 진도가 안 나가더라. 아이디어가 반짝인다고 다 보석은 아니지. 읽다가 재미없어 던져놓고 그러다가 의무감에 또 읽고, 읽은 후 대충 이해는 했으나 제대로 알지 못해 억울해서 또 읽고... 미스터리 소설을 무슨 철학서적, 난이도 높은 과학서적 읽듯이 봐야 하다니. 이건 미스터리 추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배반, 배신, 모독이야. 난 그냥 독자와의 지적 게임을 즐기는 그런 추리를 읽고 싶었어. "아~c 내가 너무 정통추리, 아니 대본소 만화 같은 공장 추리소설에 너무 세뇌된 걸까?" 이런 반성을 왜 해야 하느냐고.
<바벨의 감옥>은 처음에 뭘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었다. 이건 정말 추리가 아니다. 그냥 정신분석학에 기댄 SF소설이다. 이런 소설 읽으면서 라캉을 생각했다면 이건 절대 가벼운 소설이 아니지. 머리에 쥐가 난다. 그렇다고 제법 집중하여 읽고 이해한 후에 뭘 얻은 게 있나? 내적 승리? 승화된 자아? 아니잖아. 뭘 이런 걸 미스터리 소설 장르에서 찾아야 해. 그냥 구성과 발상이 정말 참신한 거 빼고 나면 남는거 없잖아. 재미? 흥미? 그런거 어디에도 없더라. <들러리 클럽의 음모>는 또 뭐야. 기존 고전 추리에 맹탕인 사람은 어쩌라고. 들러리 클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고전작품에서 어떻게 활동하였는지 찾아가면서 읽어야 해? 젊은 독자들이야 그나마 기억력이 좋아 이해도가 높았는지 모르겠으나 난 알쏭달쏭한 인물들이 많아 괜히 읽는 속도만 더디어 지더라. 이게 추리소설의 리뷰 모음이야 미스터리 소설이야. 모르겠다.
정리해 보면, 이 책엔 독자와의 지적인 대결, 살인의 방법, 빠른 전개, 서스펜스, 의외의 결말 등등 정통추리를 평가할 수 있는 이런 거 전혀 없다. 결론은 추리소설이 아니고, 추리소설을 하나의 모티브로 활용한 거다. 내가 착각한 거다. 그런고로 재미없다는 거지. 읽고 싶긴 뭘 읽고 싶어.
단, 추리는 아니지만 색다른 미스터리 SF에 흥미를 보이는 독자들에겐 읽고 싶은 마음이 들거란 생각도 든다. 좋게 말하면 나름 특색이 있는 책인 게지. 그건 인정한다.
아휴~ 분명 남다른 면이 있어 괜찮은 책인 건 맞는 듯한데, 뭔가 짜릿함이 있는 듯도 한데……. 짜증도 함께 한 책이 <녹스 머신이다>. 좋은 점만 써 놓을 수도 있었어나 그러기엔 '이건 아니지~'하는 앙금이 남더라. 에고…… 이 정도에서 마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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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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