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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
  1.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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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이라는 것. 그리고 '현상 인식'이라는 것. 어렵다....
무엇보다 모두의 안에 있는 어두운 면모(공통분모로서의)에 대해 동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선 한 줄의 감상에 덧붙여 백줄의 설명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자기의 중요성, 자존감이 훼손될 게 두려워 웅크린 사람들에 대해 실은 너도 나도 우리 모두 그러하다는 걸 인식시키는 게 너무나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뭐, 철학적 내용을 차용한 설명을 풀어놓으면 타인을 이해시킬 수 없을 것 같아, 감각적으로 소통하려고 딱 저 글만 썼더니.... 완전 무개념 인간 취급이네. 어차피 길게 쓰면 읽지도 않을 거잖아.....
나는 괜히 혼전 순결 논란에 낀건가?

딱히 여자편을 들고 싶지도, 남자편을 들고싶지도 않았고, 어차피 [주된 담론 생산자]는 [주된 담론 생산자]끼리 [아갈마]는 [아갈마]끼리 어울리게 되어있으니 신경쓰지 마세요...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을 고결함으로 표방하는 진짜 속물들은 역겹구요, 거기에 끼지 말고 자기길 갑시다.]가 내 글의 의도였는데.... 뭐랄까, 내 언어상 문제로 그게 다르게 받아들여 진걸까:;

[나이먹고 외모도 평범하며 성관계 유경험자인 여잔데 예쁘고 어린 성교 무경험자를 남자들이 좋아하니 키크고 돈많은 남자 골라잡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심리로 남자들의 생물학적 처녀 옹호 심리에 반발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구요]

글 전체 내용은 무시하고 딱 이부분만 잘라서 이부분을 내 글의 주된 논지로 생각하고 비난하는데....
앞으로 이런 사람들과 실제로 대면하게 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몇 번 다시 읽어도 이 부분은 그저 이데아를 표방하는 예일 뿐이고 후단에 [일반적인 사람들]에 대한 견해까지 적어놓았는데, 왜 이 부분만 집어서 주된 논지라 보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데아를 표방하는 이상 모두가 속물인데, 왜 속물이라는 말이 그렇게 거슬리고 신경쓰이는 거지.... 나는 분명 당신은 속물이야. 라고 한 게 아니고 [모두가 속물성이 있다.]고 한건데..... 뭣보다 일단 나는 그녀의 글을 먼저 읽고 쓴 게 아니라 억울하단 말이다.

그리고 다른 닉네임을 가진 내 또래의 어떤 여자가 내게 표하는 반감을 보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성을 위한 담론에 여성이라면 찬성을.
남성을 위한 담론에 여성이라면 찬성을.

요는, 그러니까 담론의 폭력적인 부분을 기꺼이 수용하고 어차피 현실은 현실인 것, 아군이나 확보하고 마음 편히 살아야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여간, 이 원글에 대해 내가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을 쓰긴 써야겠다.
나만의 공간에라도.


원글에 대해 원래 쓰고자 했던 말을 쓴다면 혹여 이 공간에 들어오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래도 내 말뜻이 뭔지는 이해될테니까.

참....
소통 거 어렵네.(스크롤 압박인 글이 읽고 싶은 글은 원글 부터 읽어 주세요.... 원글: http://cafe.daum.net/gosilove?t__nil_cafemy=item

행시사랑 자유게시판 102455번 글...인데, 그렇게 막나가게 받아들여졌나.



더보기 (원글에 대한 의도.)

남성의 능력과 여성의 성의 문제는 권력 관계가 존재하는 사회 내에서 항상 있어왔고, 교환가치로 존재해왔다. 이건 내 견해가 아니라 현상이다. 아무리 비주류 소수부족의 사례를 끌어와도 주류적 현실에서 담론이 이뤄지는 한 이 현상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문제가 남자와 여자의 문제로 치환되면 평범한 다수의 개인들은 남자와 여자가 되어 자신들의 알량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소모적 논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여자를 비난하는 남자는 비록 그 남자들이 남성 집합 전체의 일부라 해도 남녀 문제의 틀 안에서 똑같이 비난하고자 하고, 남자를 비난하는 여자 역시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담론에서 남자가 다소 유리한 건 사실이다. 그 이유는 현실의 남,녀 권력차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남려의 권력차는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고 이러한 담론들이 표면에 제기되어 논쟁의 소지가 도리 수 있다는 기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니까 남자가 유리한 이유는 권력이 월등히 우월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남성에 요구하는 기준인 능력으로서의 돈, 권력, 명예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다수가 돈과 권력, 명예를 이데아로서 추앙한다. 그러나 더불어 자신이 지닌 이러한 기득권이 흔들릴 경우에 대비해서 혹은 이러한 기득권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들에 불만을 품을 것에 대항하여 돈, 권력, 명예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나는 이러한 가치들을 숭상한다. 그리고 누구나 노력하면 이런 것들을 쟁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의 초라한 현재는 바뀔 수 있으며, 너의 미래가치는 상승할 수 있다.]는 견해와 [부, 권력, 명예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니지 못한 사람에게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으니 이들을 무시하거나 비난해서는 안되며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만을 숭상하는 건 죄악이다.]는 견해들이 그것이다.

반면 여자의 무기로 표상되는 성으로서의 외모, 젊음, 생물학적 순결은 미래가치라는 개념을 끌어오기 어렵다. 외모와 나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미 사라진 생물학적 순결에는 과거가치 혹은 현재가치만 있을 뿐이다.

더불어 외모, 젊음, 순결에 대한 인식은 부, 권력, 명예에 관한 것과 달리 관대하지 않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보호기제로서 표면적으로라도 부, 권력, 명예에 대한 무조건 숭상이 지양됨에 반해, 외모, 젊음, 순결은 자본주의하에서 바람직한 상품으로 거래된다.  더 양질의 것을 많이 소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되는....

이런 상황하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요구하는 조건보다 남성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조건이 까다로운 게 사실이다. 따라서 남성의 사회적 무능력을 비난하는 여성을 마녀사냥하기가 여성의 성을 비난하는 남성을 사냥하는것 보다 쉽다.

심지의 전자의 경우는 여자들도 동조해 담론제기자인 여자를 매도하기까지 한다.(홍대녀 사건.) 이에 대한 현상은 남자와 여자의 담론에서 특권층과 서민의 담론으로 치환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더 치열하고 서로를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런 소모적 논쟁 자체는 주류 담론에서 배제된 아갈마를 무시한 채 이뤄진다.
'아집적 논리', '피해의식적 논리'가 '허울좋은 도덕적 잣대'와 '공평성의 개념'으로 재단된다.

본인은 생물학적으로 순결하지 않으면서 또한 그렇지 못한 여자들 중 극단적인 일부 경우에만 배타심을 가지며 성경험 있는 모든 여자를 비난할 의도는 없으면서도 모든 성경험 유경험자인 여자들을 '걸레'로 모는 아집,
나는 남자를 사랑해서 혼전성교 했고, 나만 당당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극구 걸레라는 여성 비하적 발언에 반응하는 모순.

이런 논쟁은 자본주의하에서의 교환가치 때문에 쉽게 그치지 못한다.
남자도 여성의 성을 상품화 하여 인식하며 여성의 성 상품화가 역겹다고 반발하는 여성도 결국은 자신의 성을 자발적으로 상품화 하여 인식한다.

남자는 자신의 파트너가 타인과 성교한 것, 혹은 못생겼다는 것을 타인이 시시덕 댈 상황에 대한 불안 때문에(이는 어떤 여성을 소비하는지에 기반해 자기의 능력을 결정짓는 자본주의적 교환행위다.)
여자는 역으로 이런 남성들의 시선에 의해 자신이 평가절하되지 않을까하는 불안 때문에(이 역시 본인의 성을 상품화시켰기에 발생하는 불안이다.)
서로는 서로를 극단적으로 헐뜯는다.

그리고 이런 불안은 열등감을 양산한다. 여성의 바람직한 성(외모, 젊음, 순결)을 소비하는 남성과 그렇지 못한 남성간에, 그리고 이를 소유한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상간에.......

남성에 대한 능력의 기준은 보편적으로 여성들 역시 소유하고 싶어하는 가치이다. 또한 이는 소유하지 못한 부류가 절대 다수인 가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성의 성에 비해 논쟁이 덜 격렬하고, 일부 극단주의적인 주류담론 제기자들이 일시적으로 소외되기도 한다.(물론 소모적인 부분은 여성 문제와 별반 차이 없지만.)

그러나 여성의 성은 의외로 쉽게 소유할 수 있다. 패션 아이템의활용, 의학기술의 도움을 통해서 말이다. 따라서 과거 가치에 대한 집착, 성 자체에 대한 조롱으로까지 이어지는 이유가 된다. 화장발, 성형 논란, 처녀막 수술처럼 말이다.

모든 갈등 구조는 '나'도 '이데아'에 편입되고 싶고, '이데아'로 존재하고 인정받길 갈망하는데 그렇지는 못함으로 극소수의 이데아와 아갈마, 혹은 이데아를 극단적으로 증오하는 소수 혹은 이데아가 아닌 사람을 극단적으로 증오하는 소수와 아갈마 사이에 발생한다. 결국 집단간 불안, 열등감, 피해의식은 집단논리의 모순 그러니까 특정 소수 극단주의자를 향한 무분별한 배타심을 전체 집단으로 돌리는 데 열을 올리는 상황으로 귀결된다.


내 글을 상당히 안좋아하셨던 분....순진한 여자를 취하는 나쁜 남자들이 많다는 얘길 하셨다.
그러나 애초에 순진한 여자를 갖고논 남자에 대한 반발감 역시 성을 나누지 못하고 자본주의적으로 교환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사랑한다는 말, 깔끔한 옷차림, 다정한 매너라는 [미디어]가 바람직한 남자친구상으로 표상하는 허울에 홀딱 넘어가 상대방의 진심을 판별하지 못하고,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채 성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순진하다는 것은 교환가치 사회에서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순진하다는 것은 그만큼 가짜 이데아에 쉽게 속아넘어간다는 거니까. 물론 순진함은 표상을 구현하는 게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백년 전만 해도 면죄부까진 아니어도 동정표 정도는 살 수 있었겠지만, 누구라도 쉽게 표상을 구현할 수 있는 현대에서는 동정표도 살 수 없다. 최소한 본인의 진실된 감정을 순간의 분위기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눈치챌 수 있는 허울적 표상에 팔아넘기는 자본주의적 행동을 한거니까. 그건 표상을 구비해서 인기가 좋아진 남자가 나를 좋아해준다는 것에 들떠서 빚좋은 개살구를 감별하지 못한 어린 허세에 대한 대가다. 

일단 진심으로 성행위에 있어 감정적으로 충실하고 떳떳했다면, 자신에 대한 불특정 일부에 대한 시장적 평가를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 이니. 억울함이 느껴졌다면, 성을 나누지 못하고 바친 남자에게 무언가를 바랬다는 것이다. 최소한 스테디한 연애라던가, 혹은 결혼이라던가.

남자 역시 다를 바는 없다.
더 능력있는 남자가 더 많은 성을 계속적으로 소비한다는 자본주의적 허세에 빠져 사랑없이 성을 구매한다. 더 성적으로 매력있는 여자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에, 혹은 여성의 순결을 차지하려는 욕망에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게 꾸준히 선물공세를 하고, 각종 유흥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그리고나서 그 여자가 순진하지 않아서 선물만 받고 성을 제공하지 않으면, 그 여성은 된장녀가 된다. 이 경우 역시 여성의 외모 혹은 순결이라는 표상에 돈을 갖다 바친 거니까 그다지 동정표를 사긴 힘들 거다.
정말로 사랑에 충실했다면, 본전 생각에 운운하지도 않을테니까.

피해의식은 닳고 닳은 상대방이 순진하고 어린 남자와 여자를 농락해서 생기는 게 아니고, 자신의 감정이 순수하지 못해 그런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을 추천한다.)


물론 피해자라는 순진한 상대방의 감정이 순수하진 않았어도, 이를 이용한 상대방이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다. 그렇게 비화될까봐 덧붙이는데, 이건 그냥 일반적인 현상이다.
누군가 내게서 취하고자 하는 게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역으로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취하는 현상 자체가 말이다. 단지 이러한 체계 하에서는 피해자나 가해자나 똑같이 그르다는 게 내 견해이다.(물론 이에대해 가만히 있는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인 사람의 경우 둘다 나쁜 놈인지 묻는 핀트에서 어긋난 반박은 없으리라 본다. )


그러나 위의 두 문단이나 쓴 순진한 여자와 남자에 대한 내 비판역시 소모적임을 인정한다.

중요한 건 이거다.

우리 주변에는 [안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원글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은 그저 이거였다만....
이 [안 그런 사람들]이 바로 [아갈마]다.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사회에선 주류보다는 공백, 혹은 0으로서의 아갈마가 더 넓은 범위를 차지한다.

이 아갈마들은 실은 나와 무관한 타인의 능력이나 성을 진지하게 평가할 의사도 없으며(개인적 가치관은 존재하되) 갑부 저질 바람둥이도 에로배우도, 등쳐짐 당하는 순진한 아가씨나 총각도 아닌 일반인들이다.

그렇기에 현실에서의 삶은 담론이 떠도는 공간에서보다 능력과 성이 지배적이지 않으며, 그에 대한 가치관 역시 유한게 사실이다.
아갈마를 고려하지 않고 소수자가 양산 하는 주된 담론만 고려한다면, 무분별하게 몸을 다루는 남녀
는 10명 중 7명은 될 것 같고, 성을 조롱하는 남자와 남자의 무능력을 경멸하는 여자가 10명 중 8명은 될 것 같이 보일 것이다.
이로 인해 양산된 집단적 불안감, 열등감이 소모적 논쟁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아갈마를 고려하면 오히려 그러한 주류담론자가 극소수이다. 소수의 생산자가 생산한 소모적 비판이 다수의 침묵보다 더 월등히 다수인 것 처럼 보여 그 느낌이 과장된 것 뿐이다.


아갈마의 개념은 여기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는데도 시즌오프 명품관은 바글바글하다. 그러나 명품관에 바글바글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은 주류담론이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다수는 담론에 참여하지 않는(혹은 대충끼어 극단적으로 험담해도 실은 별 관심없는) 아갈마다.

이 보이지 않는 아갈마를 무시하고 명품관에 있는 사람들이 [경제 호황]이라고 하고 명품을 못 가진 자를 비난하면 다수인 아갈마들은 오히려 자기만 부자가 아닌 것 같은 불안과,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성과 능력에 대해 열을 올려 참여하는 사람들의 담론만 보는 아갈마 역시 '순결하지 못한 여자와 결혼하면 내가 이상한 남자가 되는 걸까.' '모든 남자들이 나를 걸레라고 하는 게 아닐까.' '돈이 없으면 여자와 정상적으로 결혼하는 게 불가능 한 걸까.' '돈있는 남자랑 결혼하는 게 대세인 듯 한데, 안그래도 되는 걸까.'
라는 소외감, 박탈감,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보니 이데아 보다는 기준을 낮추고 피해 의식과 열등감을 숨긴 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을 원치 않는 것으로 꾸며 고결한 척 하는 진짜 속물이 등장하는 거고, 교환가치에 근거한 사랑의 병리적 현상만 심화되는 거다.


누구나 이데아에 대한 동경과 열망, 편입욕구는 있다.

이 보편적 속물성을 인정하는 견지에서 우리 대부분이 아갈마에 속함을 이해해야 소모적 논쟁도 줄어들고, 의미없는 동일한 담론의 재생산도 멈출 것이며 보다 성숙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다수 아갈마들이 바람직한 가치로 인정하는 게 가능해질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 소모적 논쟁은 교환 가치를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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