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문

화도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5.10.8
내가 좋아하는 첩보드라마
얼마 전 '스푹스 - 더 그레이터 굿'을 보았다. 영국에서 만든 100분짜리 첩보 영화다. '스푹스'는 2011년에 시즌 10을 끝으로 막을 내린 시리즈로, 첩보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미드 '24'와 함께 너무도 유명한 영국의 첩보드라마다. 개인적으로 '24'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기다리고 있었던 '스푹스'영화를 본 김에 여러 첩보드라마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짧게 정리한다.
* ‘24’
DC와 마블처럼 첩보드라마의 양대 산맥이라면 '24'와 '스푹스'가 아닐까 싶다.
'24'의 강점은 한 시즌에 24편, 그리고 각 편이 실제(시청자와 작품 내에서도) 1시간이란 설정이다. 그러니까 하루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를 한 시즌 24편에 시간당으로 담았다는 거다. 처음 '24'를 보았을 때 이런 설정이 가능할까란 반신반의로 보았고 시즌이 지나면서 열광하기 시작했다. 시간적 제약은 드라마 내에서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조마조마하게 만드니까. 그런데 강점으로 작용한 이 점이 어느 순간 약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큰 건 스토리를 너무 배배 꼰다는 거다.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를 24편에 담으려다보니 해결될 만하면 아깝게 놓치고 실패하고, 믿었던 사람은 수시로 배신하고, 반전에 반전이 더해지고... 설정이 하루고, 24편이나 만들어야 하니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게 이해는 되지만, 어느 순간 그런 반전 등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12편쯤 보다보면 해결될 듯한 이야기 흐름에서 “또 아깝게 놓치겠지?!”, “누가 배신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고 역시나 그렇다. 어떨 때는 짜증내면서 보기도 한다. 게다가 24는 주인공 잭 바우어에 의해 돌아간다. 그의 투철한 애국심 하나로 그 큰 사건이 해결된다. 기실 잭 바우어는 하루 동안 뺑이치는 거지만 보는 사람은 24편을 좌충우돌하는 잭을 봐야한다. 매회 단편으로 이루어진 드라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점은 고역으로 다가올 수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연결로 이어진 탓에 한 회라도 놓치면 흐름이 끊어져 답답하게 만든다. 설정의 강점이 약점으로 작용한 안타까운 지점이다. 이 점에 대한 호불호가 있겠고 지적이 분명 있었을 텐데 ‘24’는 시즌을 이어가면서도 끝까지 이 설정을 놓지 않는다. 이게 ‘24’의 생명줄이라는 거다. 하루 24시간, 24편의 이야기가 ‘24’의 정체성이라는 거다. 이 점에는 동의한다. 이 설정이 없으면 ‘24’는 여타의 첩보물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우리를 흥분시킨 건 분명히 이 시간제약에 따른 다급함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영웅 잭 바우어에게만 너무 초점을 맞추지 말고 팀플을 하면 어떨까?! 물론 그가 소속된 CTU요원들이 분량을 나눠 갖지만 역시 초점은 잭 바우어에게 모아져 있다. 시즌 8에서 4년의 공백을 깨고 작년에 시즌 9가 나왔다(아직 안 봤다. 시즌 10이 언제 만들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다 소비하기엔 너무 아깝다!) ‘24’란 제목이 무색하게 12편으로 제작되었고, 11편까지는 오전 11시부터 시간당으로, 마지막 12편은 밤 10시에서 다음날 11시까지 한 회에 12시간을 건너뛴다. 이렇게 만든 이유가 늘어지는 흐름에 탄력을 주겠다는 건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시즌 8까지 이어오면서 하루 동안의 일을 24편으로 만든다는 게 결코 만만치 않음을, 어떤 이유에서든 이야기가 루즈해진다는 걸 제작진도 알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24’는 첩보드라마에 한 획을 그은 작품임에 틀림없으며, 꽤 재밌고 잘 만든 작품이다. 시즌 10이 만들어진다면 24시간이란 설정은 가져가되 굳이 시간당이란 포맷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회에 두 시간이든 몇 시간이든 흐름을 조일 수 있으면 되고, 이제는 노쇠한 잭 바우어에게 남자든 여자든(신참 여자요원이면 좋을 듯...) 비중 있는 현장파트너를 붙일 필요가 있다. 잭이 너무 고생한다...
* 스푹스
유령, 스파이란 뜻의 은어다. 영국에 알려진 첩보기관으로 MI5, MI6가 있다. MI5는 미국의 FBI처럼 국내담당, MI6는 CIA처럼 해외담당인데, 익히 알고 있는 007이 MI6소속이고, 스푹스는 MI5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여타의 드라마처럼 매회 단편으로 끊어진다. 그리고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일반적인 구성, 그러니까 매회 단편으로 가되 큰 줄기를 이루는 하나의 큰 사건이 시즌 내내 이어지지는 않는다(내 기억에...) 하지만 시즌의 마지막 편에 다음 시즌과 연결되는 고리를 만들어 이어지게 하는 흐름을 취하고 있는 걸로 기억하고 있다. ‘24’가 하루라는 특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면, 스푹스는 특이한 설정이나 구성은 아니다. 2011년에 시즌 10으로 막을 내린 이 영국의 장수 드라마에서 내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어떤 첩보물과 비교하더라도 가장 실제적인 느낌을 준다는 거다. 첨단장치가 동원되기는 하지만 그 비중은 매우 적다. 우리의 모토는 아날로그 액션이라는 듯 등장인물들은 뛰어다니기 바쁘고 첩보활동 또한 과거 미소 냉전시대의 첩보물 향기가 난다. ‘24’의 잭 바우어에게서 영웅의 냄새가 물씬 난다면, ‘스푹스’에서는 애국심으로 뭉친 팀만 기억날 뿐이다. 잭 바우어가 불사신을 연상시킨다면, ‘스푹스’는 비중 있게 활동하는 요원들이 언제 느닷없이 죽을지 몰라 조마조마하다. 작품 내에서 비중 있는 주조연들이 총 맞아 죽는 걸 여러 시즌 내내 가끔(?)씩 볼 수 있는데 뜬금없다는 생각보다 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이라고 해서 질질 끌며 마지막 가는 길이니 분량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 첩보원답게 갈 때가 되면 그냥 간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첩보원의 영웅적 활동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첩보원들의 애국적 활약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게다가 화면까지 우중충하다. 이런 점들이 실제적인 느낌을 준다는 거다. 기사를 찾아본 바, 작품 속 이야기들은 실제에 상당히 가깝다고 한다. 한 마디로 리얼리티가 살아있다는 게 정말 큰 강점이겠다.
드라마가 막을 내리고 참 아쉬웠는데 영화가 만들어졌다. 드라마에서 비중 있게 나오는 국장과 새로 만들어진 젊은 캐릭터들이 나온다. 영화이기에 블록버스터를 기대했으나 그렇지는 않다. 액션이 좀 더 많이 가미된 드라마 한 편으로 완성이 됐다. 그래도 좋았다. 스푹스란 이름으로, 드라마에서 봤던 캐릭터가 등장하고 드라마의 그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 자체만으로도 팬들은 고맙지 않을까. 가끔씩이라도 계속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단 하나의 첩보드라마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꼽을 작품이 바로 ‘스푹스’다.
스핀오프 시리즈가 있다. ‘스푹스 : 코드9’이다. 스푹스 팬들에게 많이 까이는 걸로 알고 있다. 나도 그렇다. 위에서 언급한 그런 매력이 스핀오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여타의 첩보물과 별다를 바 없는, 오히려 하향된 수준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즌1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나보다. 이해할 수 없다. 왜 이렇게 만들었지?...
* 맥가이버
따로 뭔가 얘기할 무엇도 없이 느껴질 만큼 유명한 캐릭터이자 장수 드라마. 내게 있어 허구의 인물 중 단 하나의 캐릭터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름을 댈 나의 우상. 친구들이 소피 마르소 등의 사진을 책받침으로 만들었다면, 맥가이버는 내 책받침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항상 궁금했다. 왜 맥가이버는 영화로, 요즘 유행인 리메이크, 리부트로 만들어지지 않는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스푹스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CBS방송사에서 맥가이버 리부트를 계획했다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7시즌동안 139개의 에피소드로 제작되었고 1994년에는 2편의 TV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영화는 찾을 수가 없다...) 맥가이버는 정통적인 첩보물은 아니다. 1985년에 시작된 만큼 지금 보면 많이 촌스럽지만 당시에는 꽤 세련되고 댄디한 느낌의 가벼운 첩보물이었다. 잭 바우어처럼 혼자서 사건을 해결하지만 영웅의 느낌보다 수호천사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든든함이 있다. 이 작품의 존재 이유는 단연코 맥가이버란 캐릭터 자체다. 싸움을 잘 하는 편이 아니기에 주변에 있는 도구를 이용하거나 간단하게 만든 무엇으로 적을 쓰러뜨린다. 때론 어설프게 주먹도 휘두른다. 그럴 때는 맥가이버가 거의 쓰러지거나 상대를 쓰러뜨리고는 주먹이 아파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터는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매우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첩보원이다. 허구의 모든 첩보원들이 장정 한두 명을 간단히 휙휙 쓰러뜨릴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에게는 뛰어난 지식과 응용력이 있어 주변에 있는 간단한 화학약품과 도구를 이용해 난관을 풀어버린다. 맥가이버란 그 자체와 그가 펼치는 작지만 신기한 마법 같은 활용력이 이 작품의 모든 걸 대변한다. 아주 절대적인 강점이고 존재 이유다.
그런데 이번에 계획하고 있는 리부트는 맥가이버의 20대를 다룬다고 한다. 기대반 우려반이다. 맥가이버란 이름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실체적인 맥가이버의 이미지는 그를 연기한 ‘리차드 딘 앤더슨’이다. 목까지 기른 장발에 선한 미소, 지금도 나를 여름에도 신게 만드는 농구화, 뚜껑 없는 정통 지프차, 스위스 아미 문장이 그려진 일명 맥가이버 나이프... 완전히 고착화된 이미지의 맥가이버를 누가 연기할 수 있을까?!!! 물론 배우인 리차드 할아버지는 지금 60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당연히도 새 인물이 맥가이버가 돼야 하는데, 이게 참... 광팬으로서 좀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니 제작사에서는 기존에 맥가이버가 갖고 있는 이미지라도 전부, 그대로 계승해야겠다(당연한 말인가?) 그리고 2015년이라 하더라도 첨단장치가 아닌 아날로그적인 물리와 화학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맥가이버는 그 자체의 캐릭터와 주변을 활용하는 능력, 이 두 가지를 빼면 맥가이버가 아니다. 첨단장치를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는 맥가이버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솔직히 리부트에서 이런 짓을 할 거 같다. 시대의 흐름이 어쩌고 하면서...) 그럴 거면 굳이 맥가이버란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맥가이버에게 첨단장치를 준다는 건 맥가이버에 대한 모독이고 팬에 대한 모욕이다. 제작사가 개념이 있다면 절대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그나저나 언제 방송이 될지...
첨언. 혹시라도 리부트를 ‘스푹스 : 코드9’처럼 형편없이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꽤 크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정말 개념을 안드로메다에 팔아버린 짓일 거다...
* 더 그리드
2004년에 만들어진 4부작 드라마다. 이 작품의 강점은 중동의 테러리스트를 막기 위해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들이 합동으로 팀을 꾸려 막는다는 점이다. 액션보다는 방첩활동이 주를 이루며 꽤 긴장감 있게 그려진다. 같은 계통에 있기에 라이벌 의식도 있으면서 한 팀이기에 도와야한다는 흔한 설정이 꽤 설득력 있으면서 흥미롭게 진행된다. ‘스푹스’가 현장요원들의 액션을 중심으로 한 첩보물의 모범이라면, ‘그리드’는 컨트롤 부서 내의 알력과 방첩활동의 긴장감이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전범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아쉽다. 왜 이런 작품들이 계속 안 나오는가!!!
* E-링
2005년 하반기에 방송된 비운의 작품이다. 왜 그런고 하니 시즌 1로 마감했기 때문이다. 이유야 뻔하다. 시청률이 안 나왔으니까. 개인적으로 참 재밌게 봐서 더 아쉽다. E-Ring은 미국방부인 펜타곤의 5개 동 중 하나인 E동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E동은 5개 동 중에서 군사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임무의 계획과 승인 등이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곳이다. 그런 만큼 각 부서간의 알력을 보는 재미가 있다. 주인공은 E동에서 특수작전을 지휘하는 인물로 가끔 직접 현장에서 뛰기도 한다. 정통 첩보물이라기 보다는 밀리터리물에 좀 더 가깝다. 그리고 여주인공 켈리 러더포드의 미소가 아주아주 매력적이다. 어쨌든 왜 시청률이 안 나왔을까.....
*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첩보물이라기 보단 범죄수사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첩보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하는 이유는 내가 본 시즌 1,2,3에서 첩보의 기분을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뭐라 설명을 못 하겠다...) 어딘가에 숨겨진 최첨단 기계가 도심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예언처럼 숫자라는 단서를 미리 내준다는 설정은 SF의 느낌이지만, 그 외 전체적인 분위기라든가 주조연 캐릭터 등이 묘하게 첩보의 분위기를 풍긴다. 지금 케이블에서 시즌 3이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시즌 4까지 방영되었고 최악의 분위기라는 기사를 보았다. 시즌 4는 못 봤으니 뭐라 할 말은 없는데, 난 이 작품을 시즌 2부터 굉장히 재밌게 보고 있다. 부정적인 이유로 언급된 하나가 가끔 나왔던 두 여성 캐릭터의 고정출연이라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분석도 있던데, 개인적으로 더 재밌으면 재밌었지 부정적이진 않다고 본다(캐릭터를 꽤 매력적으로 잡았고 캐스팅도 훌륭한.) 내 입맛이 홀로 싸우는 영웅보다는 팀플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부정적인 분위기가 납득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단서를 주는 최첨단인공지능 컴퓨터머신(?) 부분인데 이 점은 나도 좀 우려스럽긴 하다. 그러니까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싸우는 그들이라는 중심 이야기에서 시즌 4에서는 부수적이었던 최첨단 기계를 놓고 싸우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많이 옮겨간 듯하다. 근데 이건 설정판 자체가 흔들리는 게 아닌가. 중심이 되는 장르에 다른 장르적 요소를 섞어 다른 느낌을 조금씩 주는 건 괜찮을지 몰라도 아예 장르를 애매하게 만들어버리면... 시즌 5를 만들 계획이 유력하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캐릭터들과 전체적인 분위기 등은 다 맘에 드는데...
* 홈랜드
미드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작품성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며 현재 시즌 5가 미국에서 방영 중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알카에다에 오랫동안 포로로 갇혀있던 미해병대원이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게 된다. 죽은 줄 알았기에 남편의 친구와 재혼을 준비 중이었던 아내는 당황스럽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주인공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주인공의 적응은 쉽지 않다. 게다가 그는 이미 알카에다에 전향된 상태. 그는 몰래 첩보활동을 한다. 한편 그의 전향을 의심하는 CIA 여성요원이 있다. 우울증이 있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방송과 여론은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기에 바쁘다. 시즌 1을 이런 설정으로 하면서 진행되는 홈랜드는 인물들의 행동과 감정선이 그럴 듯하며 정말 뛰어나다는 거다. 두 사람의 불안이 흠뻑 와 닿을 정도로 이야기 진행이 뛰어나고 연기가 훌륭하다. 매회 폭발적인 굴곡이 아니면서도 끊임없이 긴장감을 흐르게 한다. 주인공의 정체가 발각이 될까말까한 상황, 결국 정체가 밝혀지고, 다시 도망쳐야하는 운명... 주인공의 진정성을 믿어주는 사람은 의심했던 여성 요원밖에 없다. 홈랜드를 처음 봤을 때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설정이 뛰어나면 캐릭터는 알아서 뛰어논다.
* 슬리퍼 셀
이슬람 테러조직에 잠입한 이슬람교도 FBI요원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언더커버 요원이고, ‘슬리퍼 셀’이란 어딘가에 숨어 지내고 있는 잠자고 있는 테러조직이란 뜻이겠다. 그런 조직에서 정보를 얻어내는 위험천만한 이야기이니 긴장감이 보통이 아니다. 시즌2도 오래 전에 마감이 됐는데, 시즌 1을 굉장히 재밌게 봤지만 시즌 2는 기대만큼 아니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여튼 시즌 2에서는 시즌 1에서 보았던 그 조마조마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이상할 정도였다. 시즌 1은 강추!
* 외사경찰
일본 드라마다. 가끔 보는 일드의 범죄수사물을 보면 아무리 심각한 내용과 분위기라도 미드만큼의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일본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가 섞여 그런가 싶은데, 어쨌든 이 작품은 내 그런 생각을 날려버린 손에 꼽는 드라마다. 우리나라 직업에도 있는 외사경찰의 뜻은 경찰학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다. [외국인, 해외교포 또는 외국과 관련된 기관이나 단체 등 외사대상에 대하여 이들의 동정을 관찰하고 이들과 관련된 범죄를 예방·단속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는 경찰활동을 말한다.] 외국인 대상이니 국제적인 사건이겠고 범죄의 범위도 테러, 마약, 산업기술유출 등으로 그 스케일이 커질 수 있다. 이 작품의 강점은 주인공이 국익을, 대의를, 다수를 위한 일이라면 불법적인 일도, 소수의 희생도 기꺼이 감수하고 희생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남자라는 거다. 선과 악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인물인데, 누군가는 해야 할,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피하거나 남에게 미루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한다는 게 매력적이다. 내가 굉장히 짜증스러워하는 일 중 하나가, 분명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고 누군가가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경우라면 좀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이성적이라는 거다. 모두 알고 있으나 자기 손에 피 묻히기 싫어 주저하고 뒤로 뺀다. 사람이니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모두를 위한 선택을 누군가 한 다음 그렇게 살아난 사람이 그 선택을 한 사람에게 그럴 수 있냐며 비난을 퍼붓는 걸 볼 때가 있다(현실이든 드라마든.) 대안도, 선택도 못하고 안 한 사람이 그럴 자격이 있는가? 모든 케이스에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입은 닥치고 있어야 그게 살아남은, 혜택을 받은 자의 양심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의 그런 선택이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면서도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는 등장인물들이 있다.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겠지만 정말 싫은 캐릭터다.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되지 말라는 명언처럼, 주인공은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에 괴로워한다. 되어가는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러나 자신이 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희생이, 누군가 대신 그런 선택을 해야 함을 알기에 무표정하게, 때론 가증스러울 정도로 그 일을 해낸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2009년에 6부작으로 나오고 2012년에 영화 한 편 나오더니 더 이상 소식이 없다. 시즌제가 많은 일드에, 왜 이 작품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지 굉장히 의아하다. 이 작품과 ‘모즈(MOZU)’는 내게 일드의 수준이 어떤지를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 쓰리 데이즈와 아이리스
우리나라에도 첩보물이 있을까? 바로 떠오르는 건 아이리스 시리즈다. 아이리스 얘기는 뒤로 미루고, 김은희 작가의 쓰리 데이즈 먼저 얘기하자. 싸인, 유령을 쓴 그녀의 이 작품은 첩보물이라기 보단 미스터리물에 좀 더 가깝다. 그럼에도 쓰리 데이즈를 거론하는 건 배경이 청와대 경호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첩보의 냄새도 곳곳에서 난다. 실종된 대통령은 어디 있었으며 그 행적의 이유와 그를 암살하려는 자들은 누구인가?로 정리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난 흠을 찾을 수 없었다. 정확히는 찾고 싶지 않았고 굉장히 재밌게 보았다. 그건 우리나라에도 이런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구나 하는 반가움과 기대 이상의 완성도를 갖췄기에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싶었을 것이다. 검색하니 시청률이 14%에 근접한다(이 정도면 중박인가?) 호불호가 갈린 듯한데 나름의 선전이고 성과고 희망적인 수치다. 영화가 특정 계층을 정할 수 있다면 드라마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기에 애매한 걸 만들기 일쑤다. 과거에 특히 심해 법정드라마는 법원에서 하는 사랑이야기, 의학드라마는 병원에서 하는 사랑이야기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나마 현재 케이블드라마의 다양한 소재와 질적 완성도가 시청률로 나타나 드라마 제작의 다양한 토대를 만들어내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공중파가 점차 이를 수용해 수준 있는 드라마를 조금씩 더 만들어내니 지금이라도 다행스러울 뿐이다. 쓰리 데이즈는 공중파드라마의 외연을 확장시켰다면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아이리스 시리즈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솔직히 아이리스 1을 그저 그렇게 봤다. 총질과 스케일 때문에라도 미드와 어쩔 수 없이 비교를 하게 되고 허술한 점이 보인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이런 드라마가 만들어졌다는, 첫 시도치고 나름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박수를 보냈다. 이후 아테나, 아이리스 2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까여도 할 말이 없을 드라마들이다. 위 드라마들의 주제가 뭘까? 아이리스 1은 몸담았던 조직에 배신당해 쫓기다가 조국을 위해 헌신한다는, 나름의 주제에 충실했던 작품이었다. 그 와중에 여주인공과의 로맨스는 그를 역경에서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했다. 로맨스에 인색하고 별 흥미가 없는 나지만 나름의 역할이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테나는? 조직 내의 이중첩자를 색출하는 거? 아이리스 조직을 완파하는 거? 남녀주인공의 로맨스? 뭐 하나 제대로 그려내는 게 없다. 양념 몇 가지를 한 번에 넣고 조물락거려 희한한 맛을 만들었다. 일부러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맛이다. 드라마의 흐름은 총질에서 갑자기 남녀주인공의 뜨거운 눈길로 이어지기 일쑤다. 마치 아침드라마에 총질이 나오는 것 같았다. 아이리스 2도 마찬가지다. 아테나를 그대로 답습한다. 답습할 거면 차라리 1을 해야지, 그렇게 혹평을 들었던 아테나를 따라한다. 이해할 수가 없다. 2는, 내가 니 아빠다,가 주제일까? 아니면 배신자 백산 국장에 대한 얘기일까? 그도 아니면 요원들의 숭고한 희생? 한 줄로 요약이 안 될 난해한 드라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중심이 없다는 거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얘기들을 다 건드리는 모양새가 돼버려 아주 어중간해졌다. 세 편을 다 보기는 했다. 아테나와 2는 욕하면서, 피식피식 웃으며 봤다. 혹평 기사에 어떤 댓글들은 그렇게 싫으면 보지 마라는 초딩스러운 귀여운 댓글들도 있던데 비평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는 얘기로 패쓰. 아이리스 3가 나올까? 예상에 그렇다. 세 편중 하나는 성공했고 어쨌든 안착을 시키려고 발버둥을 치며 아이리스라는 이름을 각인시켰으니 이대로 사장시키기에는 아까울 거다. 시청자 입장으로 어쨌든 이런 드라마를 만들었으니 다음엔 잘 좀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도 꽤 크다. 그런데 후속 두 편이 큰 타격을 받아 기약이 없고, 섣불리 건드리기엔 제작비가 꽤 많다. 계륵으로 전락한 아이리스가 아닌가 싶다. 계획이 있다면 중심을 확고히 잡길 바란다. 세상에 꽤 많은 첩보물의 모범이, 전범이 있지 않은가. 카피하라는 게 아니라 좋은 점을 깊이 있게 고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뭐, 말이야 어떤 말인들 못하겠는가만...
스푹스와 맥가이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싶어 쓰다 보니 굳이 좋아하는 첩보드라마 열편을 선정해 길게 써버렸다. 쓰면서 재밌었고 우리나라 드라마들을 폄하하기도 했지만 질적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아쉬워서 그랬고 기대가 있기에 더 아쉬웠다. 스푹스의 다음 시즌이 만들어지길, 맥가이버를 망치지 않기를, 그저 우리나라 드라마의 수준이 높아지고 다양하게 만들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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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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