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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615
- 작성일
- 2012.7.8
제가 살고 싶은 집은
- 글쓴이
- 송승훈 외 1명
서해문집
한 달 전 쯤 이사를 갈까 싶어 집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식당 이층집. 올라가는 계단은 우중충하고 집 앞 옥상에는 온갖 쓰레기가 쌓여 있고 방 세칸에 작은 거실과 부엌이 딸린 집이 각종 살림살이로 어지러웠다. 거실이랑 방을 보며 이사를 온다고 생각하고 벽지를 바꿔보고 창 앞에다 긴 탁자를 놓아보고 옥상에 벤치를 놓아보고 그렇게 상상을 했다. 그렇게 하면 살만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결국 이사는 없던 일이 되었다.
내가 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누군가 지어 놓은 집에 들어가서 여기를 나의 공간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정도. 소위 말하는 인테리어라고 해야 하나?
어제 시원스럽게 내리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들으며 침대에 기대 앉아 책을 읽었다.
『 제가 살고 싶은 집은.. 』 건축가 이일훈과 국어선생님 송승훈이 같이 집 지은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이일훈 건축가의 책 『모형 속을 걷다』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적이 있는데 크게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읽어서 머릿속에 남은 것은 거의 없고 이 책의 주인공인 집 ‘잔서완석루’는 구경삼아 집 앞에 갔다가 생각보다 훨씬 더 모던한 모양새에 놀랐던 기억이 나고. 여튼 과연 건축에 문외한이고 딱히 관심도 없는 내가 재밌게 읽을 수 있을까 하고 슬렁슬렁 읽었는데 웬걸 오후 내내 책에 푹 빠져 읽고 말았다.
책을 읽다가 형광등이 주는 피로함에 대한 얘기가 나와 형광등을 끄고 스탠드를 켠 채 책을 읽기도 하고 빗소리가 들리는 집이었으면 한다는 이야기에 새삼 창을 열고 빗소리를 들어보기도 했다.
책을 덮고는 집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살고 싶은 집, 내가 있으면 좋았던 공간, 내가 그 공간의 무엇이 왜 좋았던가 하는 기억. 그리고 사람이 어떤 빛 아래 어떤 모양의 공간 안에 있는가에 따라 얼마나 생각과 몸가짐과 감정상태가 달라지는지를 깨닫고 놀라게 되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집에 대한 섬세한 고민이 들어있는 편지와 그 섬세한 고민에 폭넓고 넉넉하게 반응하는 건축가.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갖추어가는 한 채의 집. 한 사람이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얘기하면서 인생을 얘기하고 꿈을 얘기하면 집을 짓는 사람은 그 인생과 그 꿈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구현한다. 참 시적이고 아름다운 과정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집을 짓는 것도 옷을 만드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원래는 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구나.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누려야 할 기쁨과 행복에서 정말 천리만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구나. 그것은 노동의 소외를 넘어서 삶으로부터의 소외였구나.
책 말미에 조그맣게 적혀진 이계삼 선생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 맞아. 집에서도 바깥과 다른 질을 갖는 사람의 활동이 있는 곳이지. 먹고 텔레비전 보고 자빠져 자는 것 말고 살아있는 인간의 활동이 말이지.’
집에서 살아있는 인간의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마구 샘솟는다. 옥상에 올라가 빨래도 탁탁 널고 싶고 창 앞에 서서 커피도 마시고 싶고, 바람 부는 곳에 해먹 같은 것 걸어놓고 책도 읽고 싶고 툇마루에 앉아 수박도 먹고 싶고 그냥 아주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햇볕 바라기도 하고 싶고.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은 집을 내버려두고 사는 사람들. 저녁에 들어와 밥 먹고 텔레비전 보고 자빠져 자는 것 외에는 집을 거의 이용하지도 않으면서 일평생 집을 사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세상에 당연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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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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