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리뷰

flow2
- 작성일
- 2019.7.29
정신의 삶
- 글쓴이
- 한나 아렌트 저
푸른숲
한나 아렌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수많은 작가들이 아렌트의 저서에서 ‘악의 평범성’을 인용했을 때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악인의 이미지를 깨트리는데 이 평범성은 아주 중요하다. 실제 전쟁을 다룬 책들을 읽으면서 왜 일반 군인들이 저런 잔혹한 행동을 저지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우리 속에 악이 움직였다고 하면 간단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일상적인 가정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다. 이 놀라운 통찰은 한나 아렌트란 이름을 나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각인은 나도 모르게 저자의 작품을 쉽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두께에 놀랐다. 받기 전 인터넷서점 미리보기로 몇 쪽을 읽었다. 흥미로운 글이었다. 하지만 실물의 두께와 내용은 미리보기로 본 것보다 더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기에 회사 책상에 놓아두고 매일 조금씩 읽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읽으면서 이 두툼한 철학책이 나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옮긴이의 말과 편집자 서문과 서론에서 본 것보다 훨씬 어렵게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원래 3부작으로 기획된 이 저서는 사유와 의지에서 끝나고, 판단 부분은 칸트 정치철학 강의 발췌문으로 대체되었다. 만약 3부작이 한 권으로 나왔다면 천 쪽이 넘는 분량이 되었을 것이다.
읽으면서 곱씹을 곳이 너무 많아 힘들었다. 철학책이니 당연할 것이다. 학창 시절 철학과 수업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들은 적이 있다. 겨우 몇 쪽 가지고 한 학기를 보냈었다. 그만큼 이해하기 힘들고 중요한 개념들로 가득하다. 이 책도 그 책과 마찬가지다. 저자가 사유, 의지, 판단을 정신의 삶으로 나누어 아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나치의 아이히만을 사유의 부재라고 말했는데 이때 사유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각하기와 다른 의미다. 이것은 실천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부조리와 잘못을 그냥 못 본 척 넘어가는 것과 비교하면 조금 더 쉬울지 모르겠다.
저자는 “모든 철학 용어는 은유이며, 사실상 응결된 유추다.”라고 말한다. 흔히 은유는 시어에서 많이 사용하기에 이 표현에 깜짝 놀랐다. 많은 철학자들이 시인들의 시를 인용한 것도 이 문장을 보고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란 정의를 파고들어 해체하는 모습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물론 내가 이 해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런 일들은 이후 읽는 내용 속에서도 계속 반복된다. 사유와 시간과 공간을 엮어 풀어낸 글은 그래서 더 힘들다.
한때 의지의 힘을 과소평가했고, 지금은 과대평가하고 있다. 실러가 “인간의 내면에는 의지 이외의 다른 능력은 없다.”고 선언한 것에 살짝 공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의지의 장에서 결론의 분량만 세어도 거의 90여 쪽에 달한다. 니체, 하이데거 등을 다루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인용하면서 다양한 의지의 문제를 풀어놓는다. 단순하게 의지란 용어만 생각한 나에게 이 긴 결론은 어느 순간부터 암호문처럼 다가왔다. 니체가 의지의 이중성을 극복하고 했다고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에게는 읽다 중단한 니체의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의지를 아주 조금 전해주었다.
한나 아렌트는 1975년 12월 4일 갑자기 죽었다. 불행하게도 정신 3부작은 중단되었다. 판단이론의 경구 “성공한 대의명분은 신들을 기쁘게 했지만 패배한 대의는 카토를 기쁘게 한다.”만 남겼다. 어디에서 많이 본 경구다. 아렌트에게 아이히만 재판은 판단이론도 관찰자 입장에서 연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판단 이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않았지만 칸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을 강의했다. 이 강의는 그녀의 판단 이론을 이해하는 작은 단서가 된다. 만약 정식으로 3권 판단이 나왔다면 좀더 명확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분량이었다면 더 쉽게 포기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구 결과를 하나의 주제로 관통해서 풀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방대한 서양 철학을 고찰해서 이 속에 녹여내었다. 이 결과물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독자 개개인의 노력에 달렸다. 아직 나의 노력은 많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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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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