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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9.16
자치통감 3
- 글쓴이
- 사마광 저
인간사랑
인간사랑에서 출간한 [자치통감(資治通鑑)] 3권은 한기(漢記) 21에서 한기(漢記) 33의 내용을 싣고 있다. 시기로는 기원전 41년부터 기원후 29년인 이 시기는 한의 11대 황제인 원제부터 16대 광무제(후한(後漢)의 초대황제)의 치세 초반에 해당된다. 크게 보자면 이 책은 원제의 뒤를 이은 성제의 즉위 이후 외척인 왕씨가 정권을 잡고 성제 이후 연달아 즉위한 어린 황제들로 인하여 불안한 정세가 이어지다가 결국 왕망이 선양의 형식으로 신(新)나라를 창건하였다가 광무제 유수를 포함한 반란 세력에 의하여 신(新)의 멸망과 후한(後漢)의 등장까지 다루고 있다.
굵직한 사건들이 많기는 하지만 나는 왕망(王莽)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서 이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기존 역사에서 왕망(王莽)은 물론 그가 세운 신(新)은 중국 역사에서 통일 제국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시대로 구분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실제 한(漢)나라가 신(新)을 사이에 두고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뉜 것은 신(新)을 독자적인 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新)은 1대 왕망에 의하여 15년 존속한 나라였지만, 건국한 시점이 5호 16국이나 5대 10국과 같이 수많은 나라가 건립한 혼란한 상황이 아니라 한(漢)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뒤를 무력이 아닌 선양(물론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만)의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중국 역사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않아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심지어 아예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지만, 제국의 신하의 신분에서 그대로 제국을 넘겨받아 새로운 왕조를 세운 점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생각된다. 훗날 조조와 사마의가 그런 방식으로 왕조를 열어서 그래도 재평가를 통하여 어느 정도 역사에 다뤄지고 있지만 유독 왕망은 그렇지 못하고 있으니 그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성을 느꼈다.
왕망이 중국 역사에서 부정적인 평을 넘어 거의 무관심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를 직접적으로 다룬 책을 한국에서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마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편년체 기술 방식으로 주(周)나라 시기부터 후주(後周)(송나라 건국 직전 5대 10국 중 5대의 마지막 왕조로서 조광윤은 후주의 절도사였다가 선양의 형식으로 송나라를 건국하게 된다.)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니 이 책을 통하여 왕망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전한(前漢) 후반에 외척으로 어떻게 권력을 장악하고 훗날 신(新)나라를 건국하고 또 멸망하는 과정이 오롯이 시간적으로 존재했기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그러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도 신(新)의 정통성은 철저히 부정되어 신(新)에 해당하는 서기 9년부터 23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신기(新記)'가 아닌 '한기(漢記)'로 표기되어 있으며 왕망의 대부분의 행적을 서술하되 부정적인 뉘앙스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왕망(王莽)은 부친 왕만의 요절로 유고한 까닭에 부귀와 같은 또래의 사촌 형제 등의 군형제에 미치지 못했다. (중략) 왕망은 절개를 꺾고 공감한 자세로 옷을 유생처럼 입고 근면히 두루 공부하는 근신박학을 행했다. 모친은 물론 친형인 왕영의 요절로 과부가 된 형수를 섬기면서 부친을 잃은 조카 왕광들을 양육했다. 모두 삼가며 정성을 다하는 칙비의 모습을 보였다. 또 밖으로는 영준과 사귀는 외교를 하고, 안으로는 여러 백숙을 공손히 섬겼다. 몸을 굽혀 섬기는 위곡에 성의를 보이는 예의가 있었다.
- p. 156 : 한성제 영시 원년(BC 16) 中에서 -
자치통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왕망(王莽)에 대한 기술 부분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중국 역사에서 왕망(王莽)은 상당히 부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고 한 점을 감안한다면 위 기술 내용은 그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왕망(王莽)의 출생이 기원전 45년이었으니 30세가 되는 시점에 그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으니 그가 외척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어렵게 살아왔음을 우선 확인할 수 있다. 한원제의 황후이자 한성제의 모친인 효원황후 왕씨 덕분에 왕씨 일가는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황후의 형제가 8명이었으니 이들이 군권을 비롯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위세를 떨치는 상황에서 왕망은 그의 부친이 요절하여 고모인 태후의 배려를 받을 정도로 곤궁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사촌들이 호의호식을 하며 방탕한 삶을 살았음에도 왕망(王莽)은 유생으로서 학문에 정진하고 명망있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있었으니 그의 부정적인 평가를 떠올려 본다면 뜻밖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왕망(王莽)은 그의 백부이자 대장군인 왕봉이 병으로 눕게 되자 조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껏 간호하면서 아들보다 낫다라는 평을 받았고, 이에 감명받은 왕봉은 죽으면서 태후와 황제에게 왕망을 부탁하고 이후 왕망(王莽)은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더욱 겸손하며 검소한 삶을 살았으며, 수레와 말을 빈객에 나눠 주고, 명사들을 지원하며 도와주고, 장상 및 경대부와 교제하며 자주 왕래하였으니 그의 명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아래 기록은 그의 검소한 삶을 잘 보여주는 대목인데, 사마광은 말미에 그러한 것들이 왕망이 자신의 명성을 계획적으로 높이기 위한 의도적인 것으로 기술함으로써 왕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황제가 하사한 상사와 봉읍에서 나오는 돈인 읍전을 모두 선비들에게 나눠주어 향유하게 하면서 더욱 검약한 모습을 보인게 그렇다. 모친이 병이 났을 때 공경과 열후가 부인들을 보내 문질하게 했다. 이때 왕망의 부인이 이들 부인들을 맞이했다. 치맛자락이 땅에 끌리지 않은 것은 물론 겉옷인 무릎 가리개도 삼베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 이를 본 부인들 모두 비녀인 동사로 여겼다가 물어본 뒤 왕망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경악했다. 그가 자신의 명성을 꾸민 게 모두 이와 같았다.
- p. 232 : 한성제 수화 원년 (BC8) 中에서 -
하지만 나는 과연 이런 것들이 애초부터 왕망(王莽)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자치통감에 왕망(王莽)의 기록이 그가 대략 30세가 되던 시기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위의 사례는 그가 대사마로 군권을 장악한 38세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그가 제위를 선양받는 것은 17년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주위를 의식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행적 모두가 향후 제위를 선양받기 위한 쇼맨십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 불린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는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부정적인 평을 받는 왕망(王莽)의 제위를 찬탈하기 훨씬 이전의 행적마저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둘째 아들인 중자 왕획이 노비를 죽이는 일이 빚어졌다. 왕망이 심하게 질책하며 자진하게 했다.
- p. 350 : 한애제 원수 원년(BC2) 中에서 -
왕망이 잇달아 상서해 100만 전 토지 30경을 바쳐 대사농으로 하여금 빈민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게 했다. 공경들 모두 이를 흠모하며 본받았다. 전택을 헌납한 자가 총 230명이었다. 호구의 숫자에 따라 빈민에게 나눠주었다.
- p. 391 : 한평제 원시 2년(AD2) 中에서 -
심지어 왕망(王莽)은 자신의 아들이 노비를 죽이자 아들 스스로 자결케 만든다. 이 시기에 사실 왕망은 잠시 실각한 상태였으니 어떻게 보면 이 역시 부정적으로 본다면 일종의 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법 앞에 모두 평등하다고 말하는 현재 사회에서 음주운전과 막말, 마약 밀수, 부정 입시, 부동산 비리 등을 저지른 고위 정치가의 자녀와 가족들이 의혹 또는 가벼운 처벌로 넘어가는 반면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시민들 대부분에게 잊혀지는 상황인데 수천년전 신분제가 명확한 시대에 최고 권력자가 위법을 저지른 아들을 죽음으로 단죄하는 것은 결코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더불어 그는 여전히 스스로 나서서 빈민 구제에 앞장섰으니 그에 대한 신망은 더욱 커졌고 결국 그가 서기 9년에 제위 선양의 형식으로 신(新)을 건국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만약 이것이 모두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일이라면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아래서 인고의 세월을 거쳐 패권을 차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비견될 만한 인물이 아닐까?(이에야스는 이후 수백년간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유지되었지만 왕망은 자신의 대에서 건국과 멸망이 이루어졌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하지만 그는 황제에 오르면서 이상주의적인 정치의 추진과 무능으로 인하여 점점 신망을 잃게 된다. 그는 이전의 주(周)나라 시기의 제도를 복원하여 그 시기로 회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모든 정책이 점점 이상주의로 변모하고 현실을 외면하였으니 그의 치세 말기에는 적미군과 훗날 광무제 유수가 되는 각종 반란세력으로 인하여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가 건국한 신(新)나라는 1대 15년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수많은 실정 중 관심을 끄는 대목은 신(新)의 고구려 공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망(王莽)은 내부의 불만과 그의 이상주의를 위하여 당시 중국의 주변 이민족과 왕국을 하대하는 정책을 취하였는데, 고구려 역시 그에 해당된다. 사실 이 부분은 우리 역사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았기에 흥미가 생겼다.
왕망은 또 고구려 병사를 발동해 흉노를 치고자 했다. 고구려가 행군하려고 하지 않자 요서군이 출병을 강박했다. 고구려 병사가 출새한 뒤 범법하여 침구했다. 요서 대윤 전담이 이를 추격하다가 살해됐다. 주군의 관부가 그 허물을 고구려 부족의 우두머리인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에게 돌렸다. (중략) 왕망이 엄우에게 조서를 내려 반격하게 했다. 엄우가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를 유인해 목을 벤 뒤 수급을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대열하며 하서하여, 고구려의 명칭을 '하구려(下句麗)'로 바꾸게 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 즉 맥인의 변새 침공이 더욱 심해졌다.
- P. 503 : 왕망 시건국 4년(AD 12년) 中에서 -
위 내용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언급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내용은 일치하지만 엄우라는 장수가 죽였다는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에 대한 부분은 엇갈린다. 자치통감의 기록대로라면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는 고구려 왕을 뜻하는 것인데 당시 시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왕은 바로 유리왕(琉璃王)이었다. 그가 기원전 19에서 서기 18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렸으니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가 고구려 왕이라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해 목을 베고 수급을 수도로 보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죽은 인물이 고구려의 왕이 아니라 '연비(延丕)'라는 장수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맞다고 할 수 있지만 '연비(延丕)'라는 이름이 삼국사기 이외의 사서에서는 등장하지 않기에 쉽게 정의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전사한 인물이 고구려 유리왕이라는 설과 장수 '연비(延丕)'라는 설, 그리고 '추(騶)'라는 표현으로 인하여 동명성왕(고주몽)이라는 설이 있지만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어서 앞으로도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이후 2년 뒤 서기 14년에는 고구려가 다시 신(新)나라를 공격하여 고구려현을 빼앗았다는 내용이 있지만 자치통감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니 중국과 고구려에 대한 고대사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편년체의 역사서로서 그 방대한 역사 기록으로 인하여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의 역사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들이 우리 입장에서는 낯선 인물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중국 역사의 흐름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전공자 또는 역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렇게 읽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리뷰처럼 그 시기에 주목할만한 사건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보는 것도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는 하나의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을 좀 더 상세히 찾아가면서 읽다보면 그 내용은 물론이고 점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익숙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하여 왕망이라는 중국 역사상 부정적인 평가를 받던 인물에 대한 나름의 재평가라든지 그동안 아예 접한 적이 없었던 신(新)나라와 고구려와 연관된 내용을 확장하여 찾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의미있는 독서였던 것 같다.
- 이 리뷰는 출판사 인간사랑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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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