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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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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글쓴이
위화 저
푸른숲
평균
별점9.1 (28)
소년

위화 작가는 일명 중국의 선봉파라고 불리는 작가 중 한 명인데 우리가 아는 말로 바꾸면 실험적이고 거친 작품을 쓴다는 뜻이다. 그런데 <허삼관 매혈기>로 입문해서 <원청>, <인생>을 읽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그가 전위적인 작가라는 게 잘 와닿지가 않는다. 무슨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날카로운 문자를 치켜들고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달려나가는 선봉장에서 저 뒤의 지원 병과로 소속을 옮긴 모양이다. 다만 지원 병과라고 해서 하릴없이 놀고먹으면서 세금을 축내는 게으름뱅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전투 병과가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면 지원 병과는 싸울 수 있게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선봉파 작가로 유명할 때 혼자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면 <인생> 이후로 위화 작가는 자기만 싸우는 대신 모두가 함께 싸우도록 독려하는 기분이다.


<인생>을 읽으면서 들었던 두 가지 소감은 쉽고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쉽다는 건 어려운 단어나 문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잘 아는 단어를 가지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을 만들어서 의식의 흐름에 충돌하지 않는 구조로 배치하는 걸 말한다. 요컨대 술술 읽힌다는 말이다. 이걸 한 단어로 말하면 가독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독성은 실로 마법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읽기란 근본적으로 힘든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도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읽으려고 마음 먹은 책이 아니라 지나가는 신문 기사나 칼럼 혹은 회사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게시글 등은 읽기가 힘들어서 나도 모르게 대각선으로 스르륵 내려오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글자에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가로 읽기를 하게 만드는 가독성이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가독성에 대해서라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예전에 어떤 일간지의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한 심사위원이 수상작의 가독성을 칭찬하면서 “얼마나 읽고 썼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요컨대 가독성은 노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걸 그냥 노력이라고 하면 얼핏 와닿지가 않아서 그걸 부족한 내 머리로 고르고 골라 적당한 말을 찾아보면 바로 독자가 부담해야 하는 읽기의 고통을 작가가 가져가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읽고 쓰면서 독자가 느껴야 할 읽기의 고통을 작가가 미리 가져가 버린 것이다. 실제로 위화 작가의 에세이 중에는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이라는 책도 있다.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한다는 건 한 마디로 수감 생활과 같다는 얘기일 것이고 다르게 말하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읽고 썼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책은 분명 글자로 만드는 것이고 독자로 글자를 읽는 것이지만 작가도 글자를 쓴다고 생각하지 않고 독자도 글자를 읽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글자를 창작하는 게 아니라 인물과 사건을 창작하는 것이고 독자 역시 글자를 읽는 게 아니라 인물과 사건을 읽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독성이란 글자를 선택하고 배치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과 세계에 대해 이해하는 능력이다. 많이 읽고 많이 쓴다는 건 같은 맥락에서 많은 사람을 보고 상상하는 일이고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무시하거나 흘려듣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건이 생겼을 때 그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났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의 고통과 행복은 또 어떤 식으로 교차했는지를 수없이 생각했을 때 비로소 작가는 독자에게 가로 읽기가 가능한 이야기를 꺼내줄 수 있다.


그러니 결국 가독성이란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가독성의 전제 조건이다. <인생>은 쉽다 못해 허술하게 쓰인 책처럼 보일 정도인데 그것은 작가가 보고 싶은 세상 혹은 보여주고 싶은 세상으로 책을 채우는 대신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책을 채웠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이 소설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 지면을 몽땅 푸구이에게 내어주듯이. 물론 화자나 푸구이나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므로 이 책의 이야기는 곧 작가의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작가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한다. 아마 그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말했듯이 작가가 이야기를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판단한다는 것은 결론을 낸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책 속에 주제라는 것이 생겨버린다. 독자는 그 주제를 찾고 나면 그 책이 몇 페이지든 몇 권이든 간에 한 줄의 주제로 요약할 수가 있다. 그리고 주제를 찾아낸 사람은 한 명만이 아닐 것이므로 주제가 있는 책은 몇 사람이 읽든 하나의 주제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좋은 책이 비록 한 권일지라도 읽은 사람의 수만큼 불어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인생>에서 푸구이 노인은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결론, 인생에 대한 철학 같은 것도 내비친다. 그러나 그 말은 이야기의 의미를 결정짓는 결론이 아니라 그저 이제 이 이야기가 끝났다는 신호일 뿐이다. 적어도 내게는 <인생>의 이야기가 결론이 있는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게는 이 이야기가 전화위복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살다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서 들어오는 거라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생은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고 운명 같은 초월적인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 같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숱한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욕심이나 후회도 없이 인생을 관조하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할 거라는 말처럼도 들린다. 초년에 유흥을 즐긴 사람은 노년에 고생한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구성원 중 하나가 가족을 힘들게 해도 가족 자체가 흩어지지 않으면 어떻게든 뭉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 같기도 하다. <인생>은 아마 이 모두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재미있다. 인생은 정말 그렇지 않은가. 한 사람 속에 들어있는 서로 다른 많은 이야기의 집합이 인생이다.



2024년 8월 15일부터 2024년 8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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