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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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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표기
인연
글쓴이
피천득 저
민음사
평균
별점9.4 (22)
소년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에세이를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많이 읽고 많이 쓰다보면 나도 이런 에세이를 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책을 보고 글을 쓰거나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나서였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아,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모두 제각각 개성이라는 게 있어서 입력값이 모두 동일해도 개성이라는 필터를 거치면 결과값은 모두 다르게 나온다. 그래서 누군가를 아무리 좋아하고 똑같이 쓰려고 해도 아예 베끼지 않는 이상 똑같이 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경향이랄까 글의 흐름이나 분위기 같은 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제법 닮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닮아갈 수 있다는 것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글을 자기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뜻이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아마 모든 분야에서 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중요하다. 아무리 재능이 많아도 하고 싶은 마음,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없으면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재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사람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뭐라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반면 <인연> 같은 에세이는 읽고 있으면 도저히 이렇게는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를 읽을 때도 그랬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나 <내생애 단한번> 같은 책을 보면 어려운 단어나 문장은 하나도 없는데 읽은 사람을 벅차게 만든다. <인연>도 마찬가지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없고 심지어 짧은데 난데없이 영혼의 문을 두드린다. 이런 글을 방심하고 읽고 있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울게 되는 수가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에세이가 산문이라면 피천득 작가의 에세이는 산문시에 가깝다. <인연>에는 쉬운 단어와 문장 밖에 없다. 그러나 각각의 단어는 모두 고유성이라는 걸 갖고 있다. 모든 단어는 얼마나 많이 쓰이고 덜 쓰이고를 떠나 우리 영혼의 한 부분씩을 차지한다. 잘 쓴 문장은 그래서 잘 빚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같다. 어떤 단어가 우리의 어떤 부분에 속하고 그 단어들을 어떻게 연결하면 쉽고 간단한 언어만으로도 큰 울림을 주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이것은 재능의 영역이라고 솔직히 나는 생각한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세이는 아무래도 표제작인 <인연>과 <은전 한 닢>일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은전 한 닢>은 교과서에도 실렸다. <인연>에서 작가는 소싯적에 좋아했던 아사코란 일본 여자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작가는 아사코를 세 번 만났는데 세 번째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거라고 말한다. 나는 2007년에 <인연>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내 기억에 작가가 세 번째 만남을 후회하는 이유는 세 번째 만남으로 인해 아사코라는 여자를 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읽어보니 세 번째 만났을 때 아사코는 점령군과 결혼해서 원래 가지고 있는 맑은 생기를 모두 잃어버리고 완전한 타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세 번째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거라는 작가의 말은 초라해진 사랑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 기억도 완전히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작가는 바로 그 초라해진 아사코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아사코를 잊을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처음과 두 번째 만났을 때 사랑스러웠던 아사코는 작가로 하여금 자기 안에 죽지 않은 사랑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만났을 때 그 가능성은 시들어버렸다. 이 낙차가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아사코의 아름다웠던 모습, 자기 안의 사랑의 가능성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꾸로 그 아름다웠던 모습과 자기 안에 아직 사랑의 가능성이 살아있었을 때가 인생의 잊지 못할 순간이 된 건 아닐까. 조지훈 시인의 <사모>에서 당신을 아름답게 만든 것은 ‘이미 초라해져버린 나’였다. 결혼해서 이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사코는 작가로 하여금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그의 영혼 속에 채울 수 없는 공동을 만들었다. 인연이라는 말은 인과관계의 불분명함을 대신하는 말이다. 가슴 속에 비어버린 것은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아서 아사코는 작가에게 인연으로 오랫동안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동전 한 닢>도 같은 결이라고 생각한다. 은전 한 닢, 즉 1원은 당시 물가로 작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지의 운명을 바꿔놓을 정도로 큰 돈도 아니다. 거지는 왜 이 은전 한 닢이 갖고 싶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은전 한 닢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그를 거리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은전 한 닢을 만들려면 각전 여섯 닢이 필요하고 각전 한 닢은 사십팔 푼이라서 거지는 은전 한 닢을 만들기 위해 거의 300푼에 가까운 돈을 쓰지 않고 모아야 했다. 거지의 말에 따르면 6개월이 넘게 걸렸다는데 그 6개월 동안 헐벗음과 배고픔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그가 돈을 쓰지 않고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은전 한 닢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 은전 한 닢이 배금주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별 대단치도 않고 초라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오랜 시간을 참고 견뎌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갖기 위한 과정은 많은 감동을 준다. 화폐 가치는 동일하지만 작가의 은전 한 닢과 거지의 은전 한 닢은 다르다. 작가의 은전 한 닢은 화폐 가치가 전부지만 거지의 은전 한 닢에는 보이지 않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가치가 더 붙어 있다. 그리고 이 설명할 수 없는 가치가 거지의 은전 한 닢을 화폐 가치 이상의 것으로 만든다. 배금주의가 아니라 거꾸로 모든 것을 액수로 가치판단하는 세상 속에서도 가치라는 것은 그렇게 일원화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별로 대단하지 않은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족이 그렇고 애인이 그렇다. 점령군에게 아사코는 그저 부인이었을 것이나 피천득 작가에게 아사코는 인연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이 책이 단순한 신변잡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정말로 소중한 게 맞다는 응원처럼 들린다. 남들이 폄하하는 것이어도 내게 중요한 거라면 그것은 중요한 것이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면 더욱 좋다. <어린왕자>에서 말하듯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말 가치있는 것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2025년 1월 2일부터 2025년 1월 9일까지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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