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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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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1.7.30
[영화 '카모메 식당'의 또다른 주인공 같은 장소, 식당 로케이션]
'카모메 식당'에서 지도를 무작정 짚은 손가락 끝이 향한 나라였던 핀란드로 여행을 온 미도리 역을 연기한 가타기리 하이리 씨(윗 사진에서 맨 오른쪽 분)의 여행 에세이. 카모메 식당을 촬영하는 한 달여와, 영화 촬영이 끝난 후 개인 여행으로 핀란드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썼다. 누구나 에세이라는 장르를 쓸 수 있고 특히나 요즘은 일상의 힐링용 에세이가 많다. 또 누구나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지만 그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읽고 나면 그런데 무슨 내용이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음식이나 달리기, 운동 같은 주제의 에세이도 많은데 읽고 나면 때로 딴 책과 내용이 섞여 기억되기도 한다. 이 책은 하지만 배우가 본업인 작가 하이리 씨만이 쓸 수 있는 책이라 유럽에서 그리 흔히 가지는 않는 여행지, 핀란드는 어떨까요? 하고 추천글을 남겨 본다.
난 읽은 책들을 아마존에서 리뷰 검색해 보는 것이 취미인데 뜬금없는 악평도 많은 아마존에서 가타기리 하이리의 책 3권은 모두 평점 4.5로 높은 평을 받고 있다. 한국어판으로도 모두 번역되어 있어서 더불어 이 책들도 가볍고 재미있는 에세이로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의 리뷰 중에는 투병 생활 중에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위로가 되었고 곧잘 다시 읽는다는 투고가 있었다. 나는 핀란드에 여행을 다녀온 후 우연히 핀란드를 검색하다가 이 책을 알게 되었다. (비록 여행 중에 카모메 식당의 실제 식당은 가 보지 않았지만) 영화에 나오는 아카데미아 서점-, 그 안에서 사치에와 미도리가 만나는 카페 알토(Cafe Aalto) 등은 원래 유명한 관광 스팟이라 나도 가 보았다. 핀란드에 여행을 다녀온 입장이든 아니든 이 책은 흥미롭다. 나라면 아무리 여행을 해도 이렇게 읽는 맛이 나는 글은 쓸 수 없다고, 재능있는 글을 읽었을 때의 사소한 좌절감마저 들었다! 개성 있는 문장에 감탄하다가 유머에 웃기도 하고 아마 자연스럽게 유머러스하고 여유 있기에 이런 글을 쓸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메모해 둔 책 속의 문장을 좀 옮겨 본다.
<카모메 식당>에 손님 엑스트라로 나온 수오미 식당의 세 사람에게 나는 "매일 나오는 요리가 정말 훌륭해요"하고 전했다.
요리뿐만 아니라, 이들은 참으로 멋진 사람들이었다. 나이는 나와 별 차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아저씨, 아주머니 커플과 또 한 아주머니의 사이좋은 트리오다. 이 사람들의 웃는 얼굴은 언제 봐도 멋있다. 카우리스마키영화와 마찬가지로 고생을 많이 했을 텐데, 그들의 얼굴에는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 같은 괴로운 주름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
요리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할 때 그 행복하게 웃는 얼굴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마치 밥을 갓 지은 밥솥을 열었을 때처럼, 행복한 김이 화악 올라온 뒤 나타나는 웃는 얼굴은 반짝반짝 하얗게 빛났다.
갓 지은 밥처럼 웃는 사람들이 만든 요리가 맛없을 리 없다. 핀란드의 국기와 마찬가지로 흰색과 연한 파란색 벽의 밝은 식당은 최근에 늘 만석이라고 한다.
영화나 무대의 조명도 그렇지만,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사람과 사물이 보이는 모습이 터무니없이 다르다. 여배우가 자신을 최고로 아름답게 보이도록 각도를 골라 조명판을 대듯이. 헬싱키의 해 질녘 태양의 각도는호텔 뒤 정원의 나무를, 그 그림자가 비치는 하얀 벽을, 빨강과 녹색의 의자와 소파를 참으로 화사하게 보이게 했다. 내 방은 그리고 이 도시는 백야의 해 질녘 불빛에 더욱 아름답게 녹아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핀란드에 간 계절도 여름이었다. 여름을 선택한 이유는 북유럽의 백야 때문에 해도 거의 지지 않는 시기여행하기 편하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글 속의 말처럼 백야의 햇빛은 특별했다. 사진으로 찍어도 포착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진에는 공기의 냄새나 촉감 같은 것이 표현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알고 싶으면 사진도 동영상도 소용없고 실제로 가 보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여행기란 장르이든 문장에서 읽은 것 중 이렇게 백야의 분위기를 따뜻하고 고요하게 표현한 사람은 달리 없었다. 핀란드나 북유럽에는 관심이 없더라도 공감할 문장들도 물론 있다. 그 중의 예를 들어 본다.
귀국해서 일 주일도 지나지 않아 친구와 메밀국수를 먹으러 갔다. 처음 가는 조금 비싼 국숫집에서 사치스럽게 이것저것 주문해 보았다. 잊을 수 없는 옛 애인을 만났을 때 같은 설렘이다. 우아하게 담긴 메밀국수를 후루룩 먹었다. 그러나 희한하게 그토록 꿈에 그렸던 순간이 그리 신이 나지 않았다. 맛있네, 미치겠네, 그 기분에는 변함이 없지만, 너무나 간절히 먹고 싶었던 것치고는 뭔가 맥빠지는 결말이다. 우연히 사토미 씨에게서도 이런 메일이 왔다.
돌아오자마자 국숫집에 달려갔지만, 그렇게 먹고 싶었던 메밀국수가 고맙게 느껴지지 않네요.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공교롭게 아시아 여행 때 알게 된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있어서 그 얘기를 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들도 "나도 그래요!" "나도 나도!" 하고 찬성하는 목소리였다.
메밀국수는 환상 같은 음식이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 같다. 그 막연한 맛. 설명 불가능한 풍미. 그것은 메밀국수 가까이에서 산 적이 없는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극히 한정된 지역의 감수성이다. 어쩌면 바다를 넘어간 일본인은 메밀국수 그 자체의 맛보다 그런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각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스탠바이 미. 그냥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해.
내 고향, 내 나라의 평범하게 맛있는 음식이 여행 중 굉장히 그리웠지만 막상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는 심심한 느낌이 들었을 때가 있다. 반대로 여행을 가지 못하고 집콕 바캉스 외에는 별 옵션이 없는 때에 상상하는 외국의 음식이 여행이 가능해져서 금방 체험한대도 상상했던 것보다는 맛이 없을 수도 있고 말이다. 가타기리 하이리의 책은 그렇게 일상과 여행이 매듭지어지고 교차하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핀란드의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절이 주는 감상을 너무 잘 그렸기에 그 또한 공감한 점이었다. 나는 2주 정도의 시간을 보냈는데 시간이나 날씨의 속도가 다르기에 올 때 계절이 확연히 다르다면 또다른 감상이 들 것 같다. 그러고보니 올해도 벌써 7월이 마감되고 있다. 올해는 여기저기 다니고 싶었던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겠지만 올해 여름도 약간은 별 수 없이 집콕 휴가의 나날이다. 선선한 가을이 오는 것이 기대되면서도 (코로나 때문에 모종의 박탈감이 들며) 섭섭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여행이 끝났을 때 그런 계절의 실감을 묘사한 문장도 공유하고 싶다.
돌아올 무렵 헬싱키 호텔 정원의 나무는 단풍이 들기 시작해 슬슬 장갑을 살까 고민했을 만큼 추웠다. 9월의도쿄는 아직 여름이라 매미가 울고 있다. 지난 계절을 한 번 더 되감기하는 듯한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비행기의 냉기인지 핀란드 가을의 소행인지, 트렁크를 열자 짐은 서늘하고 차가워서 그쪽에서 사용했던 세제의 진한 향이 확 피어올랐다. 가능하면 이 차가움을 좀 더 맛보고 싶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트렁크 속 내용물은 따뜻해지고 습기를 빨아들여 축축해졌다.
핀란드에서 가을 초까지 보내봤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조금은 긴 시간을 보내보고 싶었던 여행지나 사소한 장소들을 포기나 단념하고 보내는 7월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또 새로운 기운을 내는 8월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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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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