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에세이

금비
- 작성일
- 2021.7.28
단명소녀 투쟁기
- 글쓴이
- 현호정 저
사계절
우선 박지리 작가가 궁금했다. 사계절 출판사가 작가 이름을 걸고 만든 문학상이라면 그 작가님이 주는 무게감이 있기 때문일 테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궁금했다. ‘박지리’로 포털 검색을 하니, /20대에 등단/비문학 전공자/천재 작가/요절한 작가/라는 특징으로 모아진다. 거기에 요절한 작가, 라는 내용까지. 요절의 원인이 궁금해서 이리저리 뒤져도 잘 나오진 않았는데 느낌으론 알 것 같았다(나중에 찾은 기사에서 단서를 찾긴 했다). 사계절출판사가 이토록 애정을 갖고있는 작가라면, 비록 한 작품도 접한 적 없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야, 하며 그 믿음 하나로 읽기 시작한 책이 제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품인 『단명소녀 투쟁기』이다.
e북으로 먼저 읽었다. 일주일쯤 후 종이책으로 보았다. 역시 종이책이다. 같은 내용인데 눈으로 마음으로 들어오는 정도가 다르다. 중반부터 마지막까지의 내용을 읽을 때는 e북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이 생겼다. 이미 내용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종이책으로 다시 읽은 게 더 나았다. 책의 물성이 주는 경험들이 익숙하고 크고 깊어서인가. 두 가지 형식의 책 읽기에서 공통적인으로 느낀 것은 속도감이다. 과속 딱지 몇 번 끊을 정도의 속도감이다.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힘이 워낙 강해서 내가 수정(단명소녀)이처럼 내일(개)이를 타고 막 달리는 것 같다. 내 죽음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라면 나도 그렇게 달리지 않을까.
점쟁이와 비슷해 보이지만 반신(半神)인 북두로부터 “야, 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라는 소릴 듣는다. 대학입시 점괘 보러 왔다가 날벼락 같은 말을 들은 수정은 이렇게 대답한다.
“싫다면요?”
어른과 많이 싸워본 솜씨다. 그나마 소나기처럼 움직이는 죽음의 속도가 구름의 이동 속도보다 느리단다. 부적을 써주는 게 아니라, 처방을 내린다.
죽음과 반대 방향인 남동쪽을 향해 계속 걸으라.
소설초반부에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얘긴가 싶었다. 19살 수정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받은 처방을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부터 이상했다. 미성년자니까 부모님께 먼저 말해야 하지 않나, 하며 만약 내 아들이 수정이처럼 혼자 남동쪽을 향해 여정을 떠나버린다면 너무나 가슴 아플 것 같아 기성세대다운 반응이 자동으로 나왔다. 그제야 깨닫는다. SF소설이구나. 마음을 고쳐먹고 현타를 정지시켰더니 이어지는 이야기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수정의 여정에 시커먼 속과 욕망을 가진 자들이 계속 등장한다. 환상의 세계로 진입하기 직전에 만난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의 등장은 소름 그 자체였다. “야, 떡볶이 먹고 가.”란 말을 듣는 순간 나도 구역질이 났다. 이런 모욕적인 경험을 지닌 소녀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녀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떠난 길에 은주 아주머니의 백설기가 없었다면 어쩔 뻔 했는가.(여성들의 연대는 보이지 않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야기의 줄거리는 무의미하다. 작품해설을 읽고 알게 된 것. 연명설화 중 단명소년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제법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모두 남자이고 대를 이을 목적의 이야기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현호정 작가는 ‘남자아이의 목숨 늘이기 서사’(137p)를 전복하고 여자아이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투쟁기’로 바꾸었다.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는 짤막한 에피소드들에, 이건 뭐지? 하던 마음이 후반부로 갈수록 무얼 말하는 것인지 점점 뚜렷해짐을 느낀다. 맨마지막에 가서는 안도한다. 수정이가 쓴 어제와 오늘의 일기가 데칼코마니처럼 닮았지만 단어들이 담고 있는 중의적 의미들을 해석하고나면 안도의 깊은 숨을 내쉬면서 책을 덮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명을 늘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잘라내는 단명소녀, 수정에게, 우리의 어리거나 젊은 여성들에게 백설기를 나누어주는 마음으로 응원하게 될 것이다. 가부장적인 질서에 강제 편입되느라 지치고 웅크린 딸들에게 진심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다. 지하철을 탔을 때 꾸벅꾸벅 조는 젊거나 어린 여성들에게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박지리 작가의 숨을 대신 쉬고 있는 그녀의 작품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현호정의 『단명소녀 투쟁기』와 어떤 연결지점이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사계절출판사가 품고 가는 박지리 작가를 알고 싶어졌다.
*서평단에 선정되어 사계절출판사로부터 무상 제공받은 도서이며 저의 솔직한 감상문입니다.
책의 만듦새가 좋다.
양장본이라는 것부터 북끈도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듯한 흑백 두 개,
띠지 보고 놀랐다. 물결무늬의 흰띠지. 그 위에 적힌 문장들은 세로로 쓰였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것 같다.
출판사가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썼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지리 작가, 박지리문학상에 관한 기사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1011519717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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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