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 사회 역사

CircleC
- 작성일
- 2020.2.29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 글쓴이
- 윌 듀런트 저
유유
이 책 제목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는 자살을 생각하는 어떤 이가 듀런트에게 다가와 건넨 질문이기도 했다. 시대 분위기가 그럴 만했다. 1920~1930년대는 제1차 세계대전, 경제 대공황으로 서구인은 큰 트라우마에 빠졌고, 19세기까지만 해도 굳건했던 종교가 힘을 잃은 것에 반해 기계론 혹은 유물론과 다윈 이론이 사회사상으로 대두되면서 사회 변화가 컸으며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회의에 빠져 있었다. 1부는 듀런트가 삶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각적으로 살펴본 발문이고, 2부는 사회를 이루는 여러 인물(철학자, 작가, 시인, 성인, 종신형 죄수, 운동선수, 노벨상 수상자, 대학교수, 심리학자, 연예인, 음악가, 지도자)에게 서신을 보내 받은 답장이 소개되었으며, 3부에서는 그럼에도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자신의 답장을 실었다.
● 힘을 잃은 종교에 대한 듀런트의 생각
“과거의 신앙에는 뭔가 잔인한 면이 있다. 부처와 예수의 온유한 복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스러운 복수에의 탐닉으로 더럽혀졌다. 천국이 있다면 지옥도 있어야 했고, 선량한 자는 삶에서 지나치게 성공한 자나 그릇된 미신을 받아들인 자를 열심히 지옥으로 떠넘겼다. 그 ‘복된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삶이란 사악한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싯다르타는 개인의식의 소멸을 지복至福이라 불렀고 교회는 인생을 눈물의 골짜기로 묘사했다. 인간이 지상에 대해 비관주의자일 수 있었던 것은 천상에 대한 낙관주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문인의 답장을 받은 뒤 듀런트의 평가
“모두 기계론 혹은 유물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시대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성취는 이런 암묵적 전제하에 이루어졌다. 한 세대의 철학은 다음 세대의 문학이 된다. 우리 시대의 소설과 연극 ?토마스 만과 아르투어 슈니츨러, 막심 고리키와 허버트 조지 웰스, 시어도어 드라이저와 싱클레어 루이스, 에른스트 톨러와 유진 오닐의 작품들? 은 찰스 다윈과 허버트 스펜서, 니체와 칼 마르크스의 철학을 반영한다. 쇼는 베르그송으로 옮겨 갔고, 오닐은 쇼펜하우어에 프로이트를 추가하여 미국의 소포클레스가 되었다. 1932년의 과학이 1859년의 철학을 지극히 의심스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문학계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방금 내가 한 말은 잘못되었다. 우리 시대를 주도하는 작가 모두가 기계론의 깃발 아래 모여든 것은 아니다. 존 어스킨은 그가 느낀 의구심을 특유의 세련되고 관용적인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시인이란 유물론 철학의 냉혹한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마련이다?그리고 포이스는 뼛속까지 시인인 사람이다. 시인은 보통 이상주의적이며, 마치 대학 운동선수가 쓴 편지에서처럼 보란 듯이 무신론을 과시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이 부정한 신을 향해 찬송가를 부르곤 한다. 앨저넌 찰스 스윈번이 그랬고 퍼시 비시 셸리와 존 키츠도 그랬다. 시는 기계론의 손길이 닿으면 죽어 버리고 생명과 성장이라는 주제 아래에서 번성하기 때문이다.”
● 연예인, 예술가, 과학자, 교육자와 지도자 들의 견해를 들은 뒤
“철학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실제 행동뿐인 것이다. 괴테가 그랬던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생각은 모두 질병이라고.”
● 철학자 못지않게 진지한 글이었던 감옥에서 보내온 편지 중
“철학자에게 내가, 즉 종신형을 받고 감방 벽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나에게 인생의 의미란 거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 교훈을 배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그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한마디로 인생의 가치란 딱 그것을 쟁취하고 활용하려는 나의 의지만큼인 것이지요.
출판사에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삶이란, 심지어 감방 안에서도 바깥에 있는 사람의 삶만큼이나 흥미로우며 가치로울 수 있다고요. 그 자신의 인생철학이 건전하다고 믿기만 한다면 말입니다.”(오언 C. 미들턴, 뉴욕 싱싱교도소 종신형 죄수 79206번, 1931. 6.20)
많은 이들의 진지한 회신에 비하면 내로라하는 회의론자들의 발언은 참 실망스러웠다. 정말 시간이 없어서였는지 듀런트의 추측처럼 자기 책으로 내면 냈지 다른 저자의 인세에 보탬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 대표적 회의론자들의 답변
“이렇게 말하려니 유감입니다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바쁜 나머지 삶에는 의미도 뭣도 없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군요. (……) 진리의 발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버트런드 러셀의 답장, 1931. 6. 20)
“젠장, 내가 어찌 알겠소? 그런 질문에 뭔 의미가 있단 말이오?”(버나드 쇼의 답장, 1931. 6. 18)
● 그럼에도 삶에 의미가 있다는 듀런트의 답장
“타락하고 허점 많은 우리의 사회생활을 공허한 낙관주의로 덮지는 않으렵니다. 현 상태를 축소하기보다는 과장하는 편이 낫지요. 우리가 불만족스러운 전망에 슬프고 분노한 나머지 무의미한 절망에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우리의 부를 소수에 집중시키고 디플레이션을 불러온 바로 그 탐욕이 우리 영혼에도 있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부자와 우리의 동기에 있어 유일한 차이는 대체로 양심이 아니라 기회와 수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공범입니다. 서로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기 마음속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탐욕은 생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너무도 튼튼하고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한 세대, 심지어 한 세기를 들여도 뽑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음식을 찾으면 바로 뱃속에 욱여넣었지요. 언제 다시 음식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요. 오늘날 돼지들이 품종을 막론하고 음식을 보면 집어삼키는 것처럼 말이지요. 인간의 탐욕은 이런 원시 시대의 불확실성에서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악덕이 한때는 생존 투쟁에 꼭 필요한 미덕이었던 것이지요. 이는 우리의 시초에 대한 일종의 기념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유물을 나름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중략) 우리 문명의 가장 울적한 광경은 가난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뚜렷이 나타나는 도덕적 퇴보입니다. 이런 문제는 판단하기 어려운데, 한 개인의 경험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우리가 과거의 잣대로 오늘날의 세태를 재려 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잣대가 농경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산업 도시 시대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잊곤 합니다. 서른까지 결혼을 미루고 도시에서 무수한 접촉, 기회, 자극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시골 공동체에서의 도덕을 기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요. 시대가 다르면 도덕도 달라집니다. 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 볼수록 그들에게 너그러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들은 사실 신문이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의 절반만큼도 악하지 않거든요. 사람들은 대체로 무던히 성실하므로 복혼複婚과 사냥의 원시적 충동을 대리 만족하고 싶어 하며, 그래서 언론과 영화가 난잡함과 범죄의 악취를 풍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대인에게서는 미묘한 퇴보, 도덕 원칙보다는 인성 자체의 퇴보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입법자들의 지혜 덕분에 이제 지성인들은 피임을 하게 되었지만 무지한 자들은 여전히 자손 생산을 요구받습니다. 그 결과 교육받은(빈부를 떠나서) 소수는 차세대에서 더욱 소수가 되며 교육받지 않은 다수는 더욱 많은 다수를 차지하게 됩니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교육을 통해 우리 사회에 기여할 지성인이 탄생하지만, 우리 법률의 열생학적 효과로 그들은 다시 도태되지요. 교육은 좌절되고 미신이, 볼테르가 박살을 냈다고 자처했던 비천함이 변함없이 번성합니다. 진보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과업은 인류 중에서도 위태롭고 불모 상태인 소수의 손에 남겨지고요. 이 같은 군중의 무절제한 재생산이야말로 우리 정치가 부패한 이유이자 지방 자치라는 ‘기계’에 공급되는 원자재입니다. 민주주의가 파멸하는 것은 ‘언제나 다수의 바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나로서는 삶의 의미와 만족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총체에 참여하십시오.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십시오. 삶의 의미는 우리가 보다 더 큰 존재를 위해 생산하고 기여할 수 있도록 부여받은 기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꼭 가족일 필요는 없습니다?가족은 말하자면 자연이 특유의 눈먼 지혜로써 가장 소박한 이에게도 마련해 준 가장 곧고 넓은 길이지요. 개인의 잠재된 존엄성을 이끌어 내고 그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대의를 부여해 주는 것이라면 어떤 총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성별을 떠나서 누구나 헌신할 수 있는 혁명적인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페리클레스나 악바르 대제만큼 뛰어난 인물이 자신의 천재성과 목숨을 바쳐서 지키고 번영시키려 하는 위대한 국가일 수도 있고요. 때로는 창작자가 영혼을 불어넣어 이후 여러 세대에 선사하는 아름다운 걸작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면 그것은 개인이 자신을 초월하여 더욱 큰 설계의 조화로운 일부가 될 수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만족을 찾는 비결은 한 사람의 모든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그 대가로 그의 삶을 한층 충만하게 만들어 주는 과업의 발견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문명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는 가톨릭 신자로 태어나 신학대학원을 들어갔으나 사회주의와 신앙을 조화시킬 수 없어 성직자를 포기했다. 역자의 언급처럼 여성과 비서구인에 대한 시혜적 시각, 피임과 산아 제한을 부정적으로 보는 등의 종교적 영향이 느껴진다. 또한 ‘인류 전반의 퇴보’와 ‘총체에 대한 헌신’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간 전체주의 시대 정서가 느껴져 섬뜩한 느낌도 있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수고를 아끼지 않고 답을 구한 그의 노력은 분명 인류애가 담겨 있다.
내게 이 책은 삶의 의미에 대한 답보다 이 책 자체에 있다. 역사가가 정리한 시대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산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을 직접 읽으며 그 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시대에도 이런 기획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세계 대변동이 없는 때가 없었던 것도 같지만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을 헤쳐가기 바쁘고. 세계정세 분석이나 거대 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찬찬히 글로 정리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소중한 내 인생, 화이팅" 이런 거 말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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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