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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제이
  1. 영화

이미지

영화 정보
만추
감독
김태용
제작 / 장르
한국
개봉일
2011년 2월 17일
평균
별점7.4 (0)
엠제이

만추(Late Autumn, 2010)

 

1.

영화를 보며 재미를 느끼는 내 모습이 이전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요새 들어 그런 생각을 자주한다. 2월 들어 유독 무수히 많은 영화를 몰아 감상했던 건 우선 끌리는 영화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 편 이상의 영화를 보면서 단 한편도 지루하게 본 영화가 없다는 건 내겐 희한한 노릇인거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뭐 특별한 건 아니고 영화를 볼 때 그 영화가 가진 정서의 귀중함을 애틋하게 본다. 단점은 애정으로 덮고 조금 아쉬워 할 뿐이다. 예전엔 좀 아니다 싶으면 참지 못하고, 경박하게 쓰레기다 뭐다 하면서 분노했었지만, 이제는 내 일상에 한줄기의 빛이 되어주는 영화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저 내 삶에 이리 귀중한 손님이 찾아와준 것이 그저 축복으로만 생각된다.

 

 

영화 만추를 심야영화로 보고 나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만추는 내 깊은 심연을 건드릴 수 있는 세심한 촉수를 가진 영화였고, 난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추를 두 번이나 귀중한 주말시간을 쪼개 극장을 찾아 9000원이라는 거금을 텅 빈 지갑에서 쉬이 꺼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나와 영화가 소통하여 만든 기분 좋은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2.

헌데 만추가 무엇이 좋았느냐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난 이 영화를 거의 넋을 잃고 봤는데, 정확히 무엇이 끌렸는지 계산이 나오질 않는다. 날카롭게 날아와 박히는 메시지는 없지만, 만추라는 영화가 주는 가을의 정취에 푹 안기고 온 기분이다. 그래도 만추가 좋은 이유를 하나 대보자면 그건 어쩔 수 없이 탕웨이일 것이다. 켜켜이 묵은 감정의 응어리를 가슴깊이 새겨둔 그녀의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 영화는 새로운 옷을 입는 듯 맵시가 난다. 멍든 얼굴로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던 그녀가 결국엔 웃을 것이라는 믿음은 이 영화가 가진 동력이다. 관객은 아무런 표정도 없고, 세상에 아무런 기대도 없이 삶을 버텨내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웃어주길 바라고 또 바란다.

 

 

3.

영화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미동조차 하지 못하는 애나(탕웨이)의 멍든 얼굴로 시작한다. 그녀는 살인죄로 기소된 후 7년이라는 시간을 감옥 안에서 죽어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녀에게 세상 밖이란 달가운 곳이 아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안개가 자욱한 시애틀로 향하지만, 마음은 닿지 않는다. 창밖 여유로운 풍경은 애나의 것이 아니고, 그녀가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도 세상은 잘 굴러갈 것이 자명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이틀.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후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녀는 제한된 시간과 닫힌 마음 그리고 시들어버린 얼굴로 죽은 도시를 걷는다. (시애틀의 습기 가득한 우울한 정경은 미국이라는 지리적 느낌보다는 애나의 상처가 배여 있는 곳 그 자체로 기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치의 이국적인 느낌도 주지 않는 이질적 공간의 기능으로서 시애틀은 등장한다.) 이런 애나에게 훈이라는 팅커벨이 나타난다. 짠하고. 그 누가 봐도 희망이 없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이다. 죄수와 사기꾼이 만나는 이야기. 사랑하기엔 짧은 시간에, 그들의 마음은 더욱 더 짜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이 필요한 것이다. 관객은 이 참혹한 상황의 두 사람에게서 살아갈 희망을 원한다. 두 사람이 소통하고, 사랑했을 때 만들어지는 기적. 그 어떤 상황이라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무언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강렬한 믿음. 그래서 만추는 멜로가 아니라 소통의 기적을 믿는 인간의 이야기다. 이것은 곧 김태용이 만추에서 본 연출의도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마음이 열리는 찰나를 목격하고 싶다고 했다. 기적이 이루어지는 소통의 시간 그것은 김태용감독이 데뷔시절부터 추구해온 믿음으로부터 기인한다.

 

 

4.

김태용 감독은 전작 가족의 탄생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도의 영화를 만들었다. 각자 저마다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나락의 사람들에게 그는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선물한다. 혈연이 아닌 필요에 의해, 서로의 강한 끌림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족이라는 기적. 그는 영화 곳곳에 판타지라고 부를만한 요소들을 넣어놨는데, 그 판타지는 바로 시간이라는 변인이다. 시간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묶어준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건 시간이라는 요소가 변할 때 마음은 움직이고, 사람은 소통하며, 기적은 눈앞에 펼쳐진다. 어쩌면 너무나 무책임한 가정이지만, 우리는 어쩔 수없이 시간이라는 기적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면 다 잘될거라고 믿는 막연한 기대. 만추에도 그 기적을 바라는 기대가 상존한다.

 

 

만추엔 훈이라는 날건달이 애나에게 시계를 선물하면서 기적의 카운트다운은 시작된다. 애나의 죽어있던 시간은 훈이라는 팅커벨이 그녀를 자극할 때 스스로 깨어난다. 애나가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할 꺼리를 단 한가지도 찾을 수 없어 감옥으로 가는 열차표를 끊으려 할 때, 훈은 다짜고짜 그녀를 시애틀의 한 식당으로 안내한다. 그녀는 세상 밖에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따스한 햇살에 무언가 깨어난 듯 깊은 숨을 내뱉는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수 있는 첫 주체적 행위를 안겨주었다. 그 전까지 이 영화에서 그녀는 그저 반응하는 것마저 힘겨워 보였는데, 훈과 함께 있을 때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훈은 천사와 같다고 말했던 탕웨이의 말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왜 그렇게 변한 건가요?” 애나는 이 대사를 통해 자신의 가지고 있던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아주 조용히 그녀의 반응을 살펴왔던 관객의 눈앞에서 애나는 자신을 하나씩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것. 한 번도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던 관객이 끝이 다가옴이 두려워 지는 순간. 만추는 정확하게 종착역에 멈춰 선다. 그녀가 흘러가는 시간을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영화는 더 이상 내게 더 나은 상태를 선물하지 않는다. 그저 애나가 웃어 보일 수 있는 것에 만족한다. 그게 최선이다.

 

 

5.

애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탕웨이의 목소리는 묘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녀의 목소리가 중저음으로 워낙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관객이 기다려온 순간에 애나는 자신을 말한다. 물론 팅커벨 훈이 이끌어낸 공로지만, 탕웨이가 관객을 흡수해내는 능력이 실로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뷰에서 실제 성격과 많이 다른 답답한 연기를 보여줬다고 툴툴대는 그녀지만, 이 영화에서 애나의 감정은 탕웨이라는 배우 말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고 민감한 표정연기로 표출되었다.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클로즈업으로 살피는 이 영화에서 탕웨이의 얼굴이 바로 기적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녀를 웃게 하는 것이 곧 내 즐거움이 되니, 세삼 탕웨이의 절제된 표현력에 감탄하게 된다.

훈을 연기한 현빈도 역에 잘 조화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매력적인 천사와 같은 얼굴로 애나를 웃겨야 한다는 중책을 맡은 그는 진짜 천사처럼 그녀에게 진한 키스를 남기고 사라진다. 이 역으로 인해 현빈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와 함께 베를린에 2편의 영화를 올리는 수확을 얻는데, 이것은 드라마로 얻은 인기보다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을 확실하게 대중에게 인지시켜주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로서 그는 아주 편한 마음으로 입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겠죠?

 

 

6.

 일반적으로 영화라는 매체는 인위적 장치를 통해 감정을 전달한다. 그 인위가 무척이나 헛것처럼 보이고, 그 장치가 필요 없는 부산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인위가 없이 관객의 마음을 얻어오기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플롯의 기본이고, 극작술의 기초다. 그 어떤 창의적인 예술가도 피해갈 수 없는 불변의 법칙이다. 하지만 요즘 영화들을 보면 강렬한 영화적 체험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인위적 장치를 최대한 적게 쓰며 얻어가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이제 세상에는 주저리주저리 무언가 설명하지 않아도 납득이 가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일까? 시끄러운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입이 아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허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전적으로 인위적 장치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영화적 야심이 이제 먹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고작 장편영화 4편을 끝낸 김태용 감독은 그런 면에서 굉장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다. 그는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에서 우연이라는 인위적 장치를 적절히 배치했지만, 만추는 그 구조를 무너뜨리고, 배우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배우의 얼굴을 곰곰이 지켜보는 관객의 눈은 서서히 인물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장편데뷔작 여고괴담과 더 맞닿아 있다.)감독이 배우를 신뢰하고, 배우는 관객을 홀린다. 탕웨이는 꼬리가 9개 달린 여우처럼 매혹적이고 세심한 감성의 연기를 보여줬다. 어쩌면 탕웨이는 극을 이끌어 나가는 가장 강렬한 장치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영향력을 가진 배우를 보는 기회는 매우 드물다. 만추는 탕웨이의 무표정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영화다. 그게 날 무척이나 행복하게 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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