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
  1.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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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리커버] 모스크바의 신사
글쓴이
에이모 토울스 저
현대문학
평균
별점9.3 (186)
게스

세상에는,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다. 상반되어 보이는 양 극단의 장점을 모두 포용하고 있는 성격의 사람들. 재치있으면서도 항상 누군가를 배려하고, 가을이 뚝뚝 묻어날 것 같은 감성적 표정을 지으면서도 날카로운 이성을 잃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친절해서 모두가 좋아하지만, 일생을 통해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친밀하고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 로스토프 백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내 일생을 통해 그런 사람을 두세명 정도 알고 지내는 것 같다. 그 중 한 사람은 내 삼촌이다. 어릴 때 대학생이었던 삼촌은 지금은 퇴직해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지만, 언제나 내게 특별했는데, 그런 특별한 느낌을 누구에게나 갖도록 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은 우연히 삼촌과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지인을 통해서였다. 지인이 대기업의 특성상 이리 저리 치이고 채이는 나이였을 때,  삼촌은 어떤 인상 만으로도 그의 힘겨운 삶에 어떤 이유가 되어 주고 힘이 되어 주었다고 했다.


어릴 때 책을 읽은 이유는, 책 속의 어떤 이상화된 가상의 인물과의 만남이 설레임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영원히 삶을 지배할 것 같은 그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적성에도 안맞고 즐겁지도 않은 학업이라는 억압과 굴레 속을 지나가고 있을 때, 문득 문득 불빛처럼 책 속의 인물들과 교감하고 있었다. 창조된 인간의 내면과 상상적 교감이 기성 세대가 기대하는 ‘꿈’과 ‘미래’에 어떤 부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른이 보기에는 달갑지 않은 책읽는 모습과 공부하는 모습이 겉으로는 거의 비슷해 보인다는 점 때문에, 공부하지 않으면서 압력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외우지 않아 받은 불이익은 곧바로 성적표에 나타났지만, 읽는 대신 외웠다면 한없이 더 궁핍했을 가장 활발할 나이의 정신적 활동을 책이라는 매체가 풍요롭게 해준 건 분명했다.


최근에 책을 읽는 이유는 좀 다르다. 아마도 예전에 받았던 그런 느낌, 책 한 권을 끝내고 나서도 인물들은 계속해서 마음속에 살아서 나와 함께 밥을 먹고 돌아다니고, 말을 걸고 하던 무엇인가가 가슴을 가득 메우고 풍부했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책 속의 인물이 너무나 생생해서 책을 덮고도 한동안 나를 떠나지 않는 인물이 만든 책.모스크바의 신사 로스토브 백작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 한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이토록 서론이 길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을 뺀다면 내용은 크게 설명할 게 없다. 2천만명이라고 했던가 2백만명이라고 했던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 수의 목숨이 스탈린 치하에서 전쟁과 숙청으로 학살 되고 있을 때 구시대 인물(귀족)의 자택감금은, 그 이후 백작의 수십년간 감금 기간 백작의 지인들에게 일어난 일에 비하면 오히려 사치에 가까운 처벌이었다. 그의 대저택은 이미 인민의 이름으로 접수했을 테고, 4년째 스위트룸에 묶고 있던 백작의 거처는 종탑의 작은 다락방으로 옮겨진다. 다행인건가. 그가 묵던 메트로폴 호텔은 모스크바 최고의 호화 호텔로, 최고급 식당과 대중적 식당, 바, 세탁소 상점 등의 편의 시설들이 입점해 있어 남의 도움이 없어도 생활에 그닥 어려움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호텔 문을 한 발작만 나가도 그는 바로 총살된다.


소설의 제목에 신사라는 말이 쓰였는데, 신사와 영국신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신사라는 이미지가 속을 알 수 없는 이중적 모습이 연상되었지만 로스토프 백작의 신사다운 면모는 신사의 정의를 새롭게 원위치시킨다. (자신도 동의했던) 시대의 요구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러시아와 시대의 배반을 종신구금형이라는 결과로 받아들이는 태도만으로도 소설의 도입은 독자를 로스토프 백작의 정신세계로 깊이 이입시킨다.


니나와의 만남과 자연스런 이별, 우연히 돕게 된 여배우와의 하룻밤 정사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재회와 사랑, 최고급 식당의 웨이터로 일하게 되고, 식당 삼총사들과 맺는 작고 충직한 관계들, 재봉사를 비롯한 호텔 직원들과의 자잘한 관계들. 이런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와중에, 일생 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 생긴다. 호텔 감금이 시작된 초창기에 열세살 소녀였던 니나가 청년당원을 만나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그 남편이 체포되어 행방을 찾기 위해, 6살 소피아를 잠시 맡기기 위해 찾아왔다는 점이다. 조용하고 착한 아이지만, 아이는 아이. 가뜩이나 좁은 방에 어린 아이 한 명이 차지하는 공간은 예상을 넘어서고, 그동안 만들었던 고요한 생활의 질서는 깨어지고, 아이를 다룰 줄 모르는 백작은 쩔쩔맨다. 한 달 후에 찾으러 온다던 니나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감금 초기 그를 늘 찾아던 둘도 없는 친구 미시카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몰래 그를 만나러 오는데, 그가 하는 말이 가슴을 친다. 알고 보니 자네가 가장 운이 좋았다는 것.


잔잔하게 이어지지만 지루할 새 없이 자잘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미시카의 죽음과 함께 밝혀지는 비밀이 있고, 백작에게 사실상 딸이 되어 훌륭히 자란 소피아가 피아니스트가 되는 과정, 오랜 시간 감금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듯했던 백작이 드디어, 딸의 장래를 위해 위험하고도 대담한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장면 등의 클라이맥스와 안도감으로 맺는 결말이 찾아온다.


몇몇 장면은 영화에서 본 것처럼, 혹은 현실에서 만난 것처럼 생생하고 또 몇몇 장면은 잊지 못할만큼 감동적이다. 니나가 마스터 키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던 장면, 백작이 처음으로 자신의 낡은 바지를 세탁소에 가져가 재봉사에게 바느질을 배우면서 둘이 주고받는 정겨운 대화들, 자살하려고 종탑 지붕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직원과의 해프닝, 두 마리 개를 컨트롤 하지 못해 쩔쩔매는 여배우와를 돕던 첫 만남, 그렇지만 백작의 인생에 가장 큰 변화를 주는 사건은 니나가 아이를 데려와 맡기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러시아의 설원에서 러시아 혁명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여준 서구 영화, <닥터지바고>적 비애를 연상시킨다. 똑똑하고 철두철미한 공산당원으로 성장한 니나는, 당에 충성하고 열성적인 모습으로 비처지는데, 결과는 결국 남편의 숙청으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니시카의 말이 옳았다. 백작이 살아남은 것은 스탈린의 광기가 아닉 광범위한 처형과 학살을 낳기 전 단계에서 감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감금이 처형이 아닌 감금으로 끝난 데에는 더욱 아이러니한 진실이 숨어져 있다. (이것은 스포라 여기까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출처 : 트립어드바이저 메트로폴 호텔, 모스크바>


<출처 : 트립어드바이저 메트로폴 호텔,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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