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일본
하나비
- 작성일
- 2016.11.19
유곽 안내서
- 글쓴이
- 마쓰이 게사코 저
피니스아프리카에
19세기의 에도 최대의 유곽인 요시와라(吉原)의 고급 기루 마이즈루야에 희대의 소동이 벌어집니다. 요시와라를 통틀어 최고의 오이란(花魁, 몸을 파는 유녀)으로 꼽히던 가쓰라기가 홀연히 사라진 것입니다. 곳곳에 감시의 눈이 있어 쉽사리 요시와라를 벗어나기도 힘들뿐더러, 오이란으로서 절정의 시기를 누렸던데다 곧 낙적(손님이 돈을 내고 오이란을 유곽에서 꺼내주는 것)을 통해 요시와라를 떠날 예정이던 가쓰라기가 사라진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석달 후, 정체불명의 인물이 요시와라에 나타납니다. ‘그’는 유곽 주인, 시중꾼, 거간꾼 등 가쓰라기 주변 인물들을 만나 탐문을 하지만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며 가쓰라기에 대해 소소한 정보만 흘릴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집요한 조사를 통해 가쓰라기 실종 사건의 진실에 점점 다가서게 되고, 마지막에 이르러 가쓰라기의 정체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냅니다.
작년(2015년) 이맘때쯤 미야기 아야코의 ‘화소도중(花宵道中)’이란 작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작은 기루 야마다야를 무대로 오이란의 다채로운 삶과 감정들을 다룬 작품인데, 유곽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물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잘 그려내서 무척 깊은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덕분에 ‘유곽 안내서’의 출간 소식에 큰 기대를 걸었는데, 홀연히 사라진 오이란을 찾는 미스터리와 함께 유곽의 속살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감칠맛 나는 문장들 때문에 ‘화소도중’과는 또 다른 재미와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메인 스토리는 ‘가쓰라기 실종사건의 진실 찾기’지만, ‘유곽 안내서’라는 제목답게 작가는 ‘그’가 탐문하는 수많은 직종의 사람들을 통해 유곽 요시와라가 어떻게 유지되고 굴러가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고급 유녀인 오이란, 예비 오이란인 가무로, 오이란의 시중을 드는 신조, 오이란의 ‘매니저’인 반토신조, 오이란을 관리하고 교육하는 야리테 등이 그들인데, 작가는 그들의 입을 통해 각자 맡은 일은 물론 돈과 육체와 사랑과 거짓말이 한데 뒤섞인 요시와라의 복잡한 인간관계도 디테일하게 설명합니다.
요시와라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돈이 떨어지면 사랑도 없다.”입니다. 오이란을 사기 위해 남자들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돈을 쏟아 붓습니다. 심지어 시중꾼, 잡일꾼, 매니저 등에게도 적잖은 돈을 뿌려야 합니다. 하지만 돈만 있다고 오이란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합니다.
손님들 대부분의 목적은 욕망 해소지만, 그중엔 마음에 든 오이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 자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란 주머니에 돈이 남아있을 때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하다못해 잡일꾼에게마저 ‘돈 떨어진 단골’은 백해무익한 존재입니다. 물론 거꾸로 오이란이 손님에게 감정을 품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입니다. 대부분 돈만 뜯긴 채 빚더미에 올라앉거나 몸과 마음을 망친 채 불행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네모난 달걀이 없듯 오이란의 진심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미야기 아야코의 ‘화소도중’에도 비슷한 맥락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즉, “마음을 주지 않는 여자가 요시와라에서 출세한다.”라는 것인데, 하루에도 여러 남자의 품에 안겨야 하는 오이란에게 있어 진심이나 마음 같은 것은 스스로를 망치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어린 나이에 부모에 의해 푼돈에 팔린 참담한 운명도 기구하지만, 누구에게도 진심이나 마음을 줘선 안 된다는 불문율은 그녀들에게는 금언이자 동시에 날카로운 비수이기도 합니다.
가쓰라기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과 함께 최고의 부자마저 내키는대로 희롱하는 담대함을 갖춘 것은 물론 누구에게도 진심이나 마음 같은 걸 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상대방은 그녀의 접대용 거짓말에 놀아난 끝에 큰 상처를 받거나 상사병에 걸리고 말지만 가쓰라기에겐 눈 하나 깜짝할 일도 아닙니다. 바로 이런 점이 가쓰라기를 최고의 오이란으로 만든 것입니다. 또 가쓰라기에 관해 묻고 다니는 ‘그’에게 유곽 사람들이 좋은 말만 입에 담는 것을 보면 가쓰라기는 매력적인 오이란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인맥관리자’였음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이란으로서 절정의 시기를 구가하는 중이었고, 엄청난 부자 덕분에 곧 자유로운 몸이 될 예정이던 가쓰라기가 무슨 이유로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곽에서 사라진 것일까요? 또 ‘그’는 대체 누구이며, 무슨 이유로 가쓰라기 실종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는 것일까요? 그 사연은 ‘그’가 유곽 안팎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차 밝혀지긴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폭로되는 과정은 기대했던 것만큼 충격적이거나 반전을 내포하진 않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기도 한데, 다른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미스터리와 유곽 안내서라는 두 가지 기능을 절묘하게 조합한 작가의 필력도 놀라웠지만, 에도 시대의 유곽이라는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무대를 매력적으로 그려낸 것도, 또 화려한 의상과 소품은 물론 흥과 멋이 함께 하는 오이란의 행렬과 연회 장면 등 일본 특유의 비주얼을 눈앞의 풍경처럼 그려낸 것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가 큰 독자에게는 추천하기 어렵지만 19세기의 에도 유곽의 속살이 궁금한 독자라면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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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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