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북 스토리

사랑지기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8.9.23
태초의 신들 중에 염제가 있었다. 친절한 신 염제, 농업과 의약의 혜택을 인류에게 베풀었던 그는 너무나 인자한 탓에 야심 많은 후배인 황제에게 최고 신의 자리를 빼앗겨야만 했던 비운의 신이었다. 이 비운의 신에게는 딸이 넷 있었다. 이름은 각각 소녀, 적제녀, 요희, 여화였다.
소녀는 적송자라는 신선을 따라 도를 닦았다. 후에 소녀는 황제와 한의학의 기본서 『황제내경』을 만들었다. 적제녀는 뽕나무 여신이 돼 하늘로 승천했다. 막내 여화는 생전에 창세신화 속의 인물이었지만, 다시 염제의 딸로 태어났다 동해를 건너다 빠져죽은 후 새(神鳥)로 변신한다.
셋째 요희(瑤姬)는 우리말로 하면 ‘구슬 처녀’라고 할까? 보석처럼 곱고 아리따운 소녀였던 모양이지만, 불행히 시집도 가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녀는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 고이 묻혔다.
구름을 타고 나타난 무산신녀의 모습, 허리에 향초를 둘렀다. 『백미도(百美圖)』
요희는 요초(瑤草)라는 약초로 환생했다. 이 풀은 입이 겹으로 났고 노랑 꽃을 매달았으며, 열매는 마치 토사라고 하는 약초의 씨앗과 비슷하였다. 이 열매를 먹은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사랑에 한이 맺힌 요희는 훗날 무산(巫山)이라는 곳에서 다시 변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국 시대 초나라 회왕(懷王)이 무산에서 수려한 경치를 구경하다 고당관(高唐觀)이라는 누대에 이르러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런데 꿈속에서 홀연히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지 않는가?
"저는 염제의 딸로서 이곳 무산의 신녀(神女)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요염한 자태로 회왕을 유혹하였다.
무산신녀의 모습에 반해버린 회왕은 그 자리에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마침내 사랑의 행위가 끝나자 그녀는 수줍은 듯이 떠나려고 했다.
“언제 또 볼 수 있겠소?”
헤어지기가 몹시 아쉬웠던 회왕이 무산신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대답했다.
“아침에는 산봉우리에 구름이 되어 걸려 있다가 저녁이면 산기슭에 비가 되어 내리는 데 그게 바로 저랍니다.”
그러고는 홀연히 회왕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사라지고 회왕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저녁 때가 되자 과연 산기슭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회왕은 그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마구 불타올랐으나 더 이상 만날 기약은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회왕은 그녀와의 짧은 추억을 기념하여 무산의 남쪽에 조운관(朝雲觀)이라는 누대를 지었다. 조운(朝雲), 즉 ‘아침의 구름’은 무산신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산신녀도(巫山神女圖)
명대 소설 『금병매』를 보면 다음 구절이 나온다. 서문경이 왕 노파를 내세워 반금련을 유혹하는 장면이다(3회).
운우가 언제 일어날거나?
헛되이 양왕으로 하여금 초대만 쌓게 하누나
雲雨幾時就
세월이 흘러 회왕이 죽고 아들 양왕(襄王)이 즉위했다. 양왕이 어느 날 무산에 와서 선왕이 놀던 자취가 아직도 뚜렷한 고당관과 조운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송옥은 과거 선왕이 꿈속에서 나누었던 사랑 이야기를 자세히 아뢰었다.
양왕은 자신도 꿈 속에서 신녀를 만났다. 그 기이한 이야기를 송옥에게 들려주고 시로 읊을 것을 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작품이 현전하는 송옥의 「고당부(高唐賦)」와 「신녀부」다.
「고당부」가 초 회왕이 꿈에 아름다운 신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송옥이 그녀가 사는 고당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내용이라면, 「신녀부」는 초 양왕이 꿈에 신녀를 만나고 송옥이 그녀의 아름다운 자질을 묘사하는 내용이다.
「신녀부」에서 양왕이 꿈에서 본 신녀의 모습을 송옥에게 들려준 내용은 이러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볼까나
온몸을 감싼 화려한 비단 눈부시고,
수놓은 저고리, 맵시 좋은 치마에 아름다운 몸매 돋보여라.
살랑살랑 그녀 걸어올 제 온 방 안이 환해지고,
문득 몸을 돌이킬 땐 구름 속에 노니는 용과 같아.
얇은 겉옷 위로 예쁜 몸 드러나고,
머리에선 난초 향, 몸에선 두약(杜若) 내음 풍기네.
아침에는 구름이 되었다가 저녁에는 비가 되는 무산신녀와의 사랑, 이로부터 사랑의 행위를 두고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맺는다”라는 표현이 생겼다. 한편 송대 시인 소동파는 자신의 어린 애첩을 “조운(朝雲)”이라 부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송옥의 작품은 신라 시대부터 널리 읽혔다.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엮은 『초사(楚辭)』에 송옥의 작품 중 「구변」(九辯 ,가을날의 원망)과 「초혼」(招魂, 경양왕頃襄王의 혼을 부름) 두 편이 실려 있다. 최근 권용호 선생이 번역한 『송옥집』에는 「고당부(高唐賦)」·「신녀부(神女賦) 등 스무 편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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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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