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지기
  1. ♡ 언론/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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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자의 몸에는 그가 언제, 어떻게, 왜 죽었는지를 은연중에 보여주는 갖가지 흔적들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전문가들만이 볼 수 있고, 알아차릴 수 있는 침묵 속의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법의학자는 이 소소한 흔적들, 자칫하면 사라지는 말없는 증거들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려고 한다.

 

과학수사의 기본 바탕이자 완전범죄를 노리는 범인을 찾아내는 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죽은 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혹시라도 있을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범죄행위가 더 복잡한 요인들의 중첩일수록 법의학의 수준, 법의학자의 능력은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또 법의학적 시각에서는 우리 사회의 숨겨진 또 다른 이면들을 볼 수 있다.

 

■ 뒤바뀐 범인

 

시국사건 때 주목받던 법의학
현재 수사관과 법의학자 협업
정확한 사건 해결에 핵심 역할
현장 접근 제약 등 한계도 여전

 

1992년 11월쯤 서울 신림동의 여관에서 한 여성이 목이 졸려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초동수사와 부검 직후 수집된 증거들을 근거로 김모씨가 용의자로 지목됐다. 용의자 김씨는 그 여성과 오래 사귀던 남자로 현직 경찰관이기도 했다. 둘은 결혼 이야기까지 오갈 정도의 사이였다. 경찰은 강력한 수사를 통해 용의자에게서 그 여성을 살해했다는 자백까지 받아냈다. 결국 김씨는 다른 증거들도 인정돼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사건이 있은 지 1년이 지난 1993년 12월, 경찰에 19세의 젊은 남성이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경찰은 그 남성의 여죄를 추궁하던 중 다른 살인사건에도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살인사건은 다름 아닌 앞서 언급한 신림동 여관 사건이다. 더 철저한 수사결과 신림동 여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범은 피해자의 남자 친구인 김씨가 아니라 바로 이 젊은 남성으로 드러났다.

 

사건 발생 당일 범인은 여관 주변을 배회하다가 잠기지 않은 방문을 발견했다. 그는 무작정 방문을 열고 들어갔고, 방 안에 있던 그 여성을 살해했다. 그러고는 피해 여성이 갖고 있던 수표를 훔쳐 사용했다. 이 수표는 경찰관 김씨가 애인에게 준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 용의자에 대한 유무죄 판단근거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는 사망 추정 시간이었다. 사망 추정 시간은 변사자의 위 속에 남아 있는 내용물에 대한 소화상태를 분석함으로써 참고할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당시 집도의는 부검할 때 채취한 위 내용물의 감정을 담당 연구관에게 의뢰했고, 감정서에는 위 및 십이지장에 식물 성분이 일부 남아 있고 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라 식후 약 2~4시간이라고 기술됐다. 이는 내용물로 봤을 때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견해를 기술한 것으로, 사망 시간을 추정할 때 참고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수사기관은 이를 근거로 사망 시간을 새벽 3~5시쯤으로 판단했다. 이 시간에 용의자 김씨는 애인과 같이 있었고, 그 방에 다른 인물이 출입한 사실도 없다는 목격자 진술도 확보됐다. 사망 추정 시간에 같이 있던 김씨가 유력한 용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다 엄격하게 따져보면, 위 속 음식물은 여러 상황에 따라 그 소화 양상이 달라진다. 음식을 섭취한 후 잠을 자게 되면 소화가 더디게 이루어질 수 있다. 또 정신적인 긴장 상태나 음식물의 종류, 음식물의 양 등 여러 변수에 따라서도 소화상태는 여러 가지로 변할 수 있다. 이는 곧 사망 추정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건의 초기 수사에서는 소화 양상의 다양한 차이를 간과했고, 사망 추정 시간에 집착하는 바람에 범인이 뒤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수사기관과 법의학자가 사건 수사과정에서 획득한 증거들에 대한 보다 철저한 분석과 토의, 이를 바탕으로 법적 판단에 정확하게 활용하는 협업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을 수 있다. 이 사례는 20여년 전으로, 최근에는 수사기관과 법의학자의 협업이 크게 진척되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법의관들이 부검을 하고 있다.

 

필자가 실무 법의학을 시작한 이후 지난 30여년 동안 법의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과거엔 과학적 수사를 위해서 부검을 했다기보다는 단지 변사자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하나의 절차로, 대부분 기계적으로 부검이 의뢰되었다. 부검 전에 현장조사를 한다든지 현장 사진을 검토하는 것은 아주 낯선 외국 이야기였다.

 

사건 개요라는 서류 한 장과 당직 형사들의 진술에 의존해 해부가 진행되었다. 당시는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형사들이 현장을 탐문하고 경제문제나 애정 관계 등을 조사한 후 용의자를 압축해 체포한 뒤 심문을 통해 범인을 확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법의학적 감정서가 낱낱이 검토되어 범행에 사용된 흉기는 물론 그들이 어떻게 범행을 하게 되었는지까지를 법의관들에게 자문하는 경우가 많다. 또 부검할 때부터 수사기관과 법의관들 사이에 협업이 이뤄지기도 한다. 다만, 그럼에도 변사 현장 분석 등의 후진성은 별반 변한 것이 없다.

 

형사소송법상 검시의 주체는 검사이며, 현장에서 변사자를 처음 대하는 사람은 법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의사들인 경우가 많다. 아직 법의관이 현장에 가는 일은 제도적으로 그리 쉽지 않다. 일부 지역에서는 법의관들과 법의학 전공자들이 현장에 가는 경우가 있으나 여전히 제도적 한계가 있다.

 

법의학 분야나 법의학자의 일을 주제나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면서 법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아직 법의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개선이 더 필요하다.

 

의학 분야 중 외과계나 산부인과 분야는 전공의 지원자가 줄어들어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고, 이에 따라 의료 자체가 왜곡되어 국민에게 고스란히 그 피해가 전가된다는 보도들이 있다. 그런데 법의학은 더 심각하다.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법의관 충원율은 50% 이하다. 격무에 시달려 일부 법의관은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 부검실, 한국 사회상을 투영하다

 

"두 번 죽인다" 싫어하던 부검
20년간 4배 늘어 작년 8600건
사망자들의 다양한 사연 속에
우리 사회의 뒷모습 풀어낼 것

 

법의관들이 일하는 부검실에서는 우리 사회의 변화상도 읽어낼 수 있다. 의뢰되는 부검 업무를 진행하다 보면 그 변화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우선 부검 건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전국적으로 연 2000~3000건 정도였으나 2017년에는 8500여건, 그리고 지난해에는 8600건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부검 건수가 늘어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부검이라는 행위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타살인 경우에도 가족들이 부검을 결사반대함에 따라 제시간에 부검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가족이나 친·인척들이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알고 싶어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 부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물론 의문사로 보이는 사건이 늘어나고 수사기관이 정확한 사인 등을 파악하기 위해 부검을 많이 의뢰하다 보니 부검 건수가 늘어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부검이 의뢰된 변사자의 나이가 점차 고령화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우리 사회의 고령화 추세와 맞물려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변사자 중 외국인의 빈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우리 사회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외국인을 부검하는 경우는 1년에 한두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 지난 한 해 동안 의뢰된 변사자 중 10% 정도가 외국인이었다(필자 개인 통계로 한국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이 가장 많았고,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뒤를 이었다. 이제 한국은 이주노동자 등의 보건문제를 고려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홀로 삶을 영위하다 사망하는 독거사, 사망한 후 일정 시간이 지나서 발견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혼자 살다보니 심지어 사망 후 2년3개월이 지나 미라화된 상태로 발견된 사례도 있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무관심 속에서 홀로 외롭게 살다가 죽음마저 쓸쓸하게 혼자 맞이했다는 사실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또 죽고나서도 부패가 진행되도록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한 상황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런 사례를 부검하는 경우 내내 마음이 아리다. 고독사 문제에 대한 시급한 대책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신경안정제 등 각종 정신과 관련 약물들도 과거에 비해 많이 검출된다. 필자의 개인적 부검 사례의 20% 내외에서 신경안정제인 디아제팜, 수면제인 독실아민, 조현병 치료제인 이미프라민 등 다양한 약물들이 검출되고 있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정신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고령자가 늘어난 탓에 통증 치료제 역시 많이 검출되고 있다. 이제 국가가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어떤 제도를 마련해야 할지 고려해야만 하는 시점으로 보인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돋보기를 통해 유전자 분석을 하고 있다.

 

긍정적인 변화도 엿보인다. 심폐소생술 흔적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부검 사례의 30% 내외에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한 흔적이 보인다. 응급상황 대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사실 심폐소생술이 가해지면 가슴에 많은 손상이 동반되기 때문에 법의학자로서는 분석해야 할 일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응급상황에서의 심폐소생술 실시가 많아진다는 것은 기쁘게 받아들인다.

 

법의관이 부검실에서 맞이하는 변사자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오는 수많은 갖가지 사연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단면이다. 사회상을 가감없이 투영해 주는 셈이다. 한때 시국사건들이 법의학에서 큰 이슈였다면 지금은 노령인구의 증가로 인한 독거사, 정신건강 문제가 더 다가온다. 세상이 더 복잡해지면서 죽음의 이유도 더 다양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법의관은 정확한 사인을 규명하는 일을 한다. 말이 없는 죽은 자가 하려던 말을 대신 전할 수도 있다. 물론 정확한 사인 규명은 곧 수사에 큰 도움을 주는 일이다. 법의학 분야가 국민들의 더 큰 관심과 후원을 받기를 기대한다. 정부의 합리적인 제도 정비도 기대한다. 앞으로 법의학자의 시각에서 법의학적 해석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단면들, 각종 사건의 뒷모습 등을 풀어쓰려고 한다.

 

■ 필자 서중석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 중앙대 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으로 국과수에 들어간 뒤 법의학부 부장, 원장 등으로 25년여 동안 국과수에서 일했다. 대한법의학회장·아시아법과학회장, 중앙대 의대 겸임교수, 경찰대 외래교수, 대전보건대 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에스제이에스법의학연구소장 및 성균관대 교수로 검안, 부검과 강의 활동 등을 통해 법의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출처 : [서중석의 법의학] (1)부검실서 만난 '한국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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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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