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사성어

사랑지기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8.10.20
소 아홉 마리에서 털 하나를 뽑았다는 말로, 아주 많은 것 가운데 아주 적은 부분 또는 없어져도 아무 표가 나지 않는 하찮은 것을 뜻한다. 구우모(九牛毛)라고도 하며 창해일속(滄海一粟)과 비슷하다.
『한서』 「사마천열전(司馬遷列傳)」을 보면, 한 무제 때 명장 가운데 이릉(李陵)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흉노를 두려움에 떨게 하여 비장군(飛將軍)으로 불리던 이광(李廣)의 손자로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무사 중의 무사였다.
이릉은 보병 5천 명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러 나가 고군분투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지고 말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 싸움에서 이릉도 전사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이듬해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우교왕(右校王)이 되어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말이 전해지자, 무제는 격분하여 그 일족을 모두 죽이려 했다. 조정 대신이나 이릉의 옛 친구들은 격노하는 무제가 두려워 이릉을 변호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무제의 안색만 살폈다.
오직 당시 사관이던 사마천만은 이릉을 굳게 믿었으므로 그대로 있을 수 없어 그의 무고함을 변호하기 위해 무제 앞으로 나갔다.
“이릉은 적은 병력으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만, 원군이 오지 않고 우리 병사 가운데 배신자가 있어서 진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병사들과 고통을 같이하며 자기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명장입니다. 지금 그가 흉노에 투항한 것도 훗날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지책일 것입니다. 이릉의 공을 천하에 알리십시오.”
무제는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 사마천도 이릉과 똑같은 반역자라며 생식기를 자르는 궁형(宮刑)에 처했다. 궁형은 당시 형벌 중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그때 심정을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報任安書)」에 이렇게 썼다.
“제가 죽임을 당하더라도 아홉 마리 소 가운데 터럭 하나 없어진 것과 같으니[假令僕伏法受誅 若九牛之一毛] 땅강아지나 개미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에서는 제가 죽는다 해도 절개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자와는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저의 지혜가 다하고 죄는 끝이 없어 스스로 피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죽었다고 여길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원래 사마천은 땅강아지나 개미와 다를 바 없는 초라한 자기 처지에 비관하지 않고 태산 같이 무거운 죽음을 선택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치욕스런 삶을 이어간 까닭은 역사를 기록하라는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유언을 충실히 따라 『사기』를 집필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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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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