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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
위스키의 유래
위스키는 처음에 아일랜드에서 발달했다. 5세기 경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아라비아로부터 전해져 온 증류기술을 보급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문헌상 1494년 제임스 4세의 명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처음 위스키가 언급됐다. 기록에 따르면 존 코어라는 수도사가 아쿠아 비테(Aqua Vitae)를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재료는 몰트(Malt)라고 했다.
위스키의 철자 Whisky? Whiskey?
스카치 위스키의 철자는 Scotch Whisky, 아일랜드 위스키의 경우 Irish Whiskey다. 여기서 위스키의 철자에 e가 있고 없는 것에 주목하자. 영국에서 아일랜드 위스키와 차별점을 두기 위해 e를 뺐다. 그만큼 스카치 위스키는 후발 주자였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해서 역전되었을까?
1820년대까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증류업자들은 단식 증류기를 주로 사용했다. 1826년 로버트 스테인이 최초로 연속식 증류기를 개발했다. 하지만 제어가 어렵고 불안정해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1828년 그레인 위스키 제조법이 처음 개발됐다. 1846년 위스키를 만들 때 옥수수만 사용해야 한다는 법령이 철회되면서 몰트, 그레인 위스키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 1830년 아일랜드 아네스 코피가 훨씬 다루기 쉬운 연속식 증류기를 내놓았다. 당시 아일랜드 증류업자들은 전통을 중시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적극 수용했다. 이 사건과 아일랜드의 기근, 미국의 금주법으로 인해 두 나라의 위스키 산업이 역전되고 만다.
1875년까지만 해도 아이리시 위스키가 3병 중 2병을 차지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 연속식 증류기를 사용하고, 피트를 사용해 풍미를 다양하게 했으며, 블렌디드 위스키를 개발하는 등 일련의 혁신 속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때 존 워커, 시바스 형제, 아서 벨, 토미 듀어, 조지 발렌타인 등 개척자들이 뛰어난 위스키를 개발, 세계 시장을 널리 개척해 나갔다. 한편 아이리시 위스키는 큰 타격을 받아 한때 수백 개에 달했던 증류소가 지금은 단 몇 곳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 무렵 스카치 위스키가 유행하게 된 원인 중에 프랑스 와이너리를 황폐화시킨 필록세라가 있다. 필록세라는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진드기의 일종으로 수액을 빨아먹어 나무를 고사시킨다. 이 때 프랑스 와인 생산이 침체되어 스코틀랜드 민속주에 불과했던 스카치 위스키가 세계적으로 대유행, 꼬냑과 브랜드의 판매량을 추월했다. 지금도 스카치 위스키는 프랑스에서 꼬냑보다 12배 더 많이 팔린다.
스카치 위스키의 종류
1.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 : 하나의 증류소에서 물과 맥아로만 만든다. 증류기는 반드시 단식 증류기를 사용해야 한다. 증류기는 대부분 구리제이고, 맥아는 싹을 틔운 보리를 건조해서 만든다.
2. 싱글 그레인 스카치 위스키 : 하나의 증류소에서 물과 맥아 또는 보리가 아닌 다른 곡류와 몰팅을 하지 않은 보리로 만든다. 증류기는 보통 연속시 증류기다.
3.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 :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그레인 위스키를 블렌딩해서 제조한다.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가장 인기가 높다.
4. 블렌디드 몰트 스카치 위스키 : 최소 2개 이상의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를 블렌딩해야 한다. 3번과 다른 점은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만을 가지고 블렌딩해야 한다는 것이다.
5. 블렌디드 그레인 스카치 위스키 : 최소 2개 이상의 싱글 그레인 스카치 위스키를 블렌딩해야 한다. 대부분의 싱글 그레인 스카치 위스키는 단독 판매되는 것 보다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3번과 5번)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된다.
글렌리벳(Glenlivet)의 등장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의회가 통합되지만, 전쟁은 계속되었다. 1745년 잉글랜드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하일랜드의 영지가 잉글랜드 왕에게 충성했던 귀족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때 기존의 소작인들이 쫓겨나고 주류면허와 주세 등 각종 규제와 세금들이 들어섰다.
증류업자들은 깊은 계곡이나 산골짜기에 숨어들어 밀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증류소나 위스키 이름에 널리 사용되는 ‘글렌(Glen)’은 ‘계곡, 골짜기’를 뜻한다.
1823년 주세가 대폭 하향 조정되고, 대형 증류소가 합법화되었다. 1824년 ‘글렌리벳(Glenlivet)’이 최초로 주류면허를 취득했다. 당시 다른 증류업자들은 글렌리벳을 배신자라며 불을 지르거나 영업을 방해하기도 했다.
피트(Peat, 이탄泥炭)의 풍미
피트(peat)는 스카치 위스키에 빼놓을 수 없는 풍미를 더해준다.
산골짜기에 숨어든 증류업자들은 뜻하지 않게 위스키의 색과 풍미를 개선하는 노하우를 얻었다. 당시 위스키는 불법적인 '밀주'였던 탓에 판로가 여의치 않아 몇 년 동안 와인을 담는 오크통에 재워놓기도 했다. 이때 위스키는 황금빛으로 변하는가 하면 거친 맛이 부드러워지면서 과일 향과 절묘하게 조화돼 그 맛이 더욱 풍부해졌다.
다른 하나는 맥아를 건조시킬 때 땔감으로 석탄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피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피트는 물이끼, 히스, 사초 같은 습지식물들이 퇴비화된 것이다. 즉 습지식물들이 침적되면서 차곡차곡 쌓여 퇴적층을 이루고 이 과정에서 피트가 만들어진다. 피트는 각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갖는데 이러한 특징을 잘 파악한 증류업자들이 자신만의 몰트 위스키를 생산할 수 있었다. 이때 맥아에 피트를 태우면서 나오는 연기를 쐬는 방식으로 농도를 맞추는데, 위스키의 가벼운 스타일부터 묵직한 스타일까지 피트 함유량에 따라 차이가 난다.
대부분의 증류소에서는 맥아 건조를 직접 하지 않고 맥아를 만드는 몰팅 공장에 주문한다. 현재 피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증류소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만의 개성 있는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피트를 사용한다.
글렌리벳(Glenlivet) 이야기
앞서 1824년 ‘글렌리벳(Glenlivet)’이 최초로 주류면허를 취득한 것을 상기하자. 글렌리벳이 결정적으로 유명세를 얻는 것은 1822년 조지 4세가 에딘버러를 방문했을 때였다. 월터 스콧 경이 왕에게 밀주 글렌리벳을 대접했다. 왕은 그 맛에 반해 앞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들은 건배를 할 때 글렌리벳을 사용해야 한다고 칙령을 내렸다. 아울러 스콧 경에게 밀주를 합법화시킬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1822년 조지 4세가 에딘버러 리스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
(George IV landing at Leith 1822 by Alexander Carse)
스콧 경은 주세를 대폭 완화하고 면허를 도입하는 등의 Excise법을 제안, 통과시켰다. 당시 스콧 경의 소작농이었던 조지 스미스(George Smith)가 ‘글렌리벳’으로 맨 처음 주류면허를 신청했다. 한편 다른 증류업자들의 위협이 잇따르자 스콧 경은 조지에게 쌍권총을 선사했고, 조지는 이 쌍권총을 차는 한편 24시간 경비원을 두기도 했다. 1859년 조지는 아들 존 고든(J. G. Smith)과 함께 스페이 강 지류인 리벳 강 부근에 증류소를 설립했다.
‘글렌리벳’은 ‘리벳 강의 계곡’이라는 뜻이다. 왕이 인정한 위스키라는 소문 때문에 유사 상표가 범람하자, 조지는 1875년 ‘더(The)’를 붙여 ‘더 글렌리벳’으로 상표 등록하는 한편 소송을 벌였다. 1884년 재판 결과 “Glenlivet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The Glenlivet’은 오직 글렌리벳 증류소에서만 가능하다‘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글렌리벳은 1953년 글렌그랜트와 합병됐고, 1977년 캐나다의 씨그램으로 편입된 후, 현재 페르노리카에 속해 있다. 대표작은 글렌리벳 싱글 스페이사이드(Speyside, ‘스페이 강가’라는 뜻) 몰트 12년산으로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위스키 중 하나다. 한편 글렌리벳 엑설런스는 기존 글렌리벳 12년산과 달리 셰리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원액 비중을 높여 블렌딩했기 때문에 과일향이 풍부하다.
싱글몰트 12년산은 미국 내 판매율 1위다. 15년산은 오크통에서 추가 숙성시켜 독특한 풍미가 난다.
*위 내용은 아래 세 권에서 요약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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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