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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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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13.7.9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는 전쟁에서 태어났고 전쟁에서 죽었다. 격동의 시대에 ‘스스로를 만들어 낸 사람’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아군·적군의 사체가 널려 있는 황무지에 고독하게 앉아 있는 사내, 철모를 쓰고 여기저기 찢어진 군복을 입고 목에는 라이카 카메라를 걸고 입술에는 체스터필드 담배를 물고 미소 짓는 사내로 떠오른다. 또한 공포에 젖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하는 사내. 카파는 그런 이미지로 인화된 한 장의 흑백사진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죽음은 모두에게 불운이다. 특히 카파에게는 더욱 그렇다. 생전에 그는 아주 활기찬 사람이었기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하루는 너무나 길고 힘들었다.”
▲ 먼지구름 속의 병사. 1938년 11월7일, 스페인의 아라곤 전선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헤밍웨이가 이 인터뷰를 하기 3일 전인 1954년 5월24일 오후 3시10분, 카파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베트남 호찌민군의 포격으로 사망해 자신이 찍었던 전쟁 보도사진처럼 우리 곁에 남았다. 간혹 ‘초점이 약간 안 맞고 노출이 약간 부족하고 구도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사진들뿐!’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이 말은 카파 사진에 대한 예찬이기도 했다. 그의 사진들은 대중을 움직이게 한 시대의 프로파간다이다.
카파가 쓴 제2차 세계대전 종군기를 보면 그는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대상을 향한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손과 몸, 영혼과 마음은 심하게 떨고 있었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보고 찍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것들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두려운 ‘사실’이었다. 시대의 사실을 인간의 진실로 만드는 카파의 사진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현장을 똑똑히 보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오마하 해변을 침투하던 미군들의 사진도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전우들의 살점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오열하는 장교 바로 옆에서 촬영한 카파는 겨우 살아남아 필름을 미국의 ‘라이프’지에 우송했다. 35㎜ 필름 네 롤, 120㎜ 필름 대여섯 롤은 마감에 쫓기던 직원의 실수로 대부분 못 쓰게 되고 10장의 사진만 남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카피와 함께 라이프지에 게재된 ‘오마하 해변에 상륙 중인 미군 공격 제1파 부대 병사의 얼굴’이다. 그의 생은 이러한 필름의 운명과 닮았고, 이 사진으로 카파는 종군기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사진을 보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때의 절박한 현장이 되살아난다. 이 사진은 카파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전쟁은 다소 낭만적이었습니다.”
카파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면서 남긴 이 말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짐작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이스라엘 전쟁, 중·일전쟁, 인도차이나 전쟁(유일하게 한국전쟁은 비켜 갔지만), 그는 전쟁과 함께 살았다. 그가 죽음의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쟁에 대한 낭만성에 기인한다. 카파는 항상 밝은 표정과 매력적인 이야기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참혹한 전쟁의 시대에 카파는 낭만성과 유머로 삶을 무장했다.
카파는 태생부터 시대와 불화했다.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잠정적인 적국인으로 분류된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다.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한 손이 육손인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그가 한 살도 되기 전에 조국 헝가리는 독일 편이 돼 1차 세계대전에 가담했다. 헝가리에서 앙드레 프리드만(Endre Erno Friedmann)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던 카파는 좌익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가 극적으로 베를린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통신사 데포트의 암실 보조원으로 취직,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강연 사진을 찍어 사진가로 인정을 받는다. 이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베를린을 떠나 파리로 건너가 게르다 타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로버트 카파라는 미국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카파의 첫사랑 게르다 타로는 그에게 큰 흔적을 남겼다.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을 취재했고, 카파는 사진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게르다는 공화군 탱크에 치여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그녀의 죽음은 평생 카파의 고통이었다. 카파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후 카파는 많은 여자를 사랑했다. 일레인 저스틴(일명 핑키), 잉그리드 버그만, 윈스턴 처칠의 딸 파멜라를 비롯해 아름다운 여자들과 만났다. 매순간 옆에 있는 여자들을 유혹하고 섹스에 탐닉했다. 심지어 헤밍웨이의 부인이었던 마사 겔혼과 새벽 네 시에 호텔방에 같이 있었다. 카파가 왜 거기 있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카파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사랑했다. 나이, 국적, 인종, 결혼 여부를 가리지 않았다.
여기에 카파를 이야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있다. 그는 머물지 않고 항상 떠나는 보헤미안이다. 이성과 본능, 집과 호텔, 평화와 전쟁, 아내와 애인, 순정과 섹스 중에서 카파는 철저하게 후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두 가지는 서로 적당히 섞여야 하는데 카파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본능과 호텔, 전쟁과 애인들 속에서 하루를 평생처럼 살았다. 포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걸으면서 카파는 말했다. “전쟁에서는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사랑해야 한다. 어떤 입장에 있지 않으면 상황을 견뎌낼 수 없다.”
카파는 헤밍웨이나 존 스타인벡과 같은 작가들, 종군기자인 어니 파일을 비롯한 기자들, 매그넘 공동 창립자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같은 사진계의 걸출한 인물들을 만났다. ‘카파 시대’에 유럽과 미국에 살았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카파와 애증 관계를 유지했다. 그가 사랑한 사람들이 언제 저격병의 총에 피를 흘리면서 절명할지 모르는 현장에서 카파는 두려웠다. 아이러니하게 그 두려움이 그를 온전히 살게 했다. 그는 말했다.
“다시 전쟁에 가야 한다면 나는 총으로 자살해버릴 거야. 난 너무 많은 걸 봤어.”
이런 말을 하고 또 전쟁에 간다. 이른바 카파식의 행동이다. 그는 “술 금지, 노름 금지, 폭격기 금지, 여자 금지”를 다짐한다. 이 중에서 카파는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더 했다.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험한 장소로 내몰았다.
우리는 카파의 사진을 본다. 그가 사진으로 기록한 난중일기를 보면, ‘카파의 사진에서는 화약 냄새가 난다’는 평가가 아직까지 유효하다. 그가 과연 찍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우리들 내면에 있는 폭력, 증오, 파시즘이 아니었을까? 그는 카메라를 들고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과 싸웠다. 무솔리니, 히틀러, 프랑코와 싸웠다. 그는 인간을 조롱하는 파시즘과 싸웠다.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폭력과 증오를 찍었다. 거기에서 흔들리고 부딪치고 피 흘리며 쓰러지는 ‘사람’의 장면을 찍었다.
카파는 자신의 사진을 단 한 줄로 이야기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아서다.” 시대와 사람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읽으면서 우리는 카파를 통해 배운다. 만약 당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건 너무 멀리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상의 폭력과 전쟁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 준다. 진실에 좀 더 가까이 가자. 가서 찍든 못 찍든 더 가까이 가자. 거기에 삶이 있다. ‘카파’가 있다. 카파는 카메라를 손도끼처럼 들고 세상의 폭력을 찍었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자신만의 갤러리가 있다. 그 갤러리에는 추억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고, 살면서 보았던 인상적인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 사진은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고 있는데 멈추어 있고, 멈추어 있는데 계속 흔들리면서 주위의 공기를 떨리게 만든다. 그 떨림이 소리가 되어 나를 부르고 있다. 기억과 소리가 만나면 음악이 된다. 카파의 사진들은 우리들의 적막한 인생 갤러리에 천둥소리처럼 들려온다. 그곳에 카파의 사진을 걸고 에릭 호퍼의 이 문장을 적어두자. ‘악마를 잘 다루려면 맞붙어 싸울 것이 아니라 이용해야 한다.’
<원재훈 | 소설가>
일시: 2013. 8. 2(금) ~ 2013. 10. 28(월)
장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서울 종로구)
주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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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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