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서재

2comma
- 작성일
- 2018.10.22
보헤미아 우주인
- 글쓴이
-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저
알에이치코리아(RHK)
우주 공상과학 이전에 한 나라의 역사와, 개인의 삶, 철학을 오롯이 담은 놀라운 소설!
자신이 누리는 것은 잃어보아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감동적인 이야기!
우주는 인류의 터전으로 한계점에 임박한 지구의 대안인가, 광활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순수한 탐험의 대상인가, 최첨단 과학 기술을 누가 먼저 멀리 쏘아 올려 정치적 깃발을 꽂을 것인가를 두고 강대국들이 벌이는 상징의 무대인가. 우리는 그간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등의 작품을 통해 우주를 향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의 시도들을 보아왔다. 소설 <보헤미아 우주인> 역시 그런 의미의 성격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조국 체코의 부름을 받아 우주비행사가 되어 금성으로 떠난 야쿠프 프로하스카, 그의 눈에 비친 광활한 우주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 너머에 존재하는 극한의 외로움, 내적 고독 등 통해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까지 말하자면 <인터스텔라>, <그래비티>, <마션> 등의 유사 작품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체코의 역사와 격변기를 지나온 한 남성이 겪어야만 했던 과거와의 사투, 범우주적인 가치들을 철학적으로 접근하여 꽤나 진지한 질문들을 던지는 작품으로 조금은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다. 자칫 천문학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공상 과학으로 가득한 SF 소설을 기대했다면 내적 묘사와 자아 성찰로 가득한 이 소설에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문장과 섬세한 작가의 필력에 빠지게 되면 이 책에 쏟아지는 찬사와 수식들이 결코 아깝지 않음을 금세 깨닫게 된다.
정반대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것은 잃어보아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 357p
2018년 봄, 체코의 국민들은 국유지 감자밭에서 발사되는 우주왕복선 얀후스 1호에 잔뜩 기대를 모으고 있다. 우주라는 거대한 세상을 향해 쏘아 올리는 자국의 눈부신 과학 발전을 지켜보며 국민들은 마치 조국의 승리를 맛보는 듯한 희열에 휩싸인다. 그도 그럴 것이 1939년 나치에 점령당한 뒤, 19345년 다시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쿠데타로 공산주의 국가가 된 체코는 소련군의 침공을 맞고 무혈, 비폭력 혁명을 이끌어낸 바츨라프 하벨의 '벨벳 혁명'을 거듭하며 가슴 아픈 역사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정치적 격변기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체코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한몸에 받으며 얀후스 1호에 탑승한 야쿠프 프로하스카는 체코의 변화를 상징하는 이 위대한 역사와 과학적 영광까지 함께 짊어지고 금성과 지구 사이에서 관측되는 '초프라'라는 불가사의한 입자를 체취하기 위해 우주로 떠난다.
카렐대학교 천체물리학과 교수이자 우주 먼지 연구자인 야쿠프는 사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 비행사도 아니고, 지구로 안전하게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위험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과거 공산 정권 아래에서 국가를 위해 일했던 아버지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권의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인민의 배신자이자 국가의 악당이 되어버리자 야쿠프는 거의 마녀사냥에 가까울 정도로 주위의 야멸찬 시선과 폭력에 얼룩진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자신을 한결같이 지켜준 할아버지와 할머니마저도 어렵게 일군 고향집을 떠나 서글픈 죽음을 맞이해야했고, 이것이 그에게는 내내 상처로 남았다. 이렇듯 소설은 아버지의 과오를 씻고 자신을 손가락질 했던 사람들에게 복수를 함과 동시에 이제는 자신이 국민의 영웅이 되려는 야쿠프의 굴곡진 인생과 가슴 아픈 체코의 역사를 정교하게 엮어나간다.
"당신 아버지는 부역자이자 범죄자, 오늘날까지 우리 나라를 괴롭히는 것들의 상징입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의 아들로서 움직이고 전진하며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로부터 멀어지는 겁니다. 야쿠프 프로하스카,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의 아들, 개혁을 거친 공산주의자의 빛나는 본보기인 거죠. (…) 시민의 겸손한 종복이자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인 동시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화신이며 과학자이기도 하고요. 나는 우주에 체코인을 보내고 싶고, 그 체코인은 당신이 될 거야. 유럽은 우리를 비웃을 테고 부담을 떠안을 납세자들은 회의론으로 울부짖겠지만, 이 계획에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고, 우리는 당신을 잘 포장해서 그 이미지를 팔아먹을 수가 있어요. 프라하의 우주인. 변화된 나라의 상징이 우리 깃발을 우주로 가져가는 거지. 이해하겠소?" / 79p
나는 눈을 감고 수를 세며 지금 아버지가 나를 떠메고 세상의 모든 언어로 사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한다. / 150p
하지만 순조로울 것 같았던 우주비행에 있어서도 난관이 있었으니, 바로 사랑하는 아내 렌카를 오랫동안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내와의 화상 통화만을 고대했던 그에게 어느 날, 렌카는 통화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마치 다른 삶을 살기라도 할 것처럼 변화하기 시작한 그녀의 태도에 그는 더더욱 지독한 외로움에 휩싸인다. 그러면서 야쿠프는 그녀와 나누었던 그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마치 예견된 불행이었던 것처럼, 야쿠프가 초프라에 가까이 접근해 마침내 미션을 성공하기에 이르려는 순간 얀후스 1호가 비상사태에 빠지고 그 역시 죽음에 임박하고야 만다. 우연의 기회로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도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영웅이라는 허울만 남겨져있을 뿐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자가 되어버리고 난 뒤였다.
나에게 헛된 것은 없다. 하누시에게도, 렌카에게도, 체코 우주국에게도, 늘 저 너머와 밑, 다음, 아래쪽을 찾는 고집스러운 인간의 눈에도 헛된 것이라고는 없다. 공기와 행성 그리고 건물과 몸뚱이를 구성하는 원자들, 빈둥거리며 생명과 생명에 반하는 왕조 전체를 견디고 있는 원자들 속에도, 헛된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 198p
어쩌면 작가는 야쿠프가 우주 공간에 있을 때가 아니라 지구로 돌아왔을 때 보고 느끼고 겪게 되는 일들에 더 마음을 쏟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라는 감정 밖에서 부부가 서로 얼마나 다른 것을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 남편의 집착과 남편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가려지지 않는 인생을 원했던 렌카의 진짜 삶을 뒤늦게 목도하고만 야쿠프를 보면서 '정반대의 상황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없고 누리던 것을 잃었을 때에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다'는 깨달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주에 있을 때 내가 임무에 참여해도 되는지 아내의 허락을 받았던 순간들을 머릿속에서 꾸며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질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내가 결정했다. 내가 평생 동안 이런 식으로 행동한 건 아닌지,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내 몸속에 흐르는 또 다른 유전적 유산, 즉 아버지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특징은 아닌지 궁금했다. / 334p
내가 들어선 곳은 서재였는데 책장에는 그녀의 책인 전 세계 소설들만 꽂혀 있고 내 두꺼운 논픽션 책들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 둘이 읽던 책을 보더라도 나는 지구 외부의 모든 걸 정복하고 싶어 했던 반면 렌카는 내가 떠나고 싶어 한 행성의 구석구석을 알고 싶어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 348p
<보헤미아 우주인>은 우주란 물리적으로 먼 어느 행성과도 같은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계하는 모든 것들, 내 삶,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 소설이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범우주적인 가치와 철학을 모두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이 소설만이 보여주는 대담하고도 독창적인 부분들은 분명 이 작가의 이름을 계속해서 기억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덕분에 차기작을 기다리게 만드는 작가가 한 명 더 생겼다는 것이 기쁘기까지 하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