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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H
- 작성일
- 2025.5.13
진공 붕괴
- 글쓴이
- 해도연 저
한겨레출판

SF 오타쿠로서...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는 SF 소설 단편집을 만나서 그저 기분이 좋다.
과학 소설이 결국에는 '문학'이라는 점은 저명하지만, 그 속을 채우는 과학적 이론들과 빈틈없는 물리적 상관관계는 SF 문학을 더욱 찬란하게 빛나도록 해준다. 우주과학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저자의 이력은 이 점을 정말 잘 보여주었는데, 모든 문장들이 과학적 이론과 세밀한 숫자들로 소설의 개연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촘촘한 과학적 이론들로 직조된 이 소설들은 사랑, 이별, 증오, 애정, 삶, 죽음을 아름답게, 때로는 잔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독자가 소설에 한껏 몰입하여 이야기 속 세상을 편하게 유영할 수 있게 도와준 저자의 문장들에 감사하다.
첫 소설인 '검은 절벽' 사랑 이야기이다. 다른 점이라 하면,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 더욱 다른 점이라면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점일까. 어쩐지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분노나 고마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되는데, 사랑에 빠진다는 건 전혀 상상이 안 된다.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고차원적인 감정이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런 인공지능의 이야기를 많이 접하지 않아서일까. 답습한 사랑도 사랑일까. 누가 정답을 알 수 있을까.
'텅 빈 거품'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었다. 진공 붕괴로 인해 빛의 99.8%의 속도로 태양계를 향해 다가오는 진공 거품은 150년 후 태양계를 소립자 단위로 분쇄시킬 예정이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인간이 그 분쇄를 인지할 틈도 없이 증발해 버릴 예정이라는 것. 세계정부는 지구에게 남은 약 150년의 짧은 시간 동안, 살아남은 인류가 아무런 진실도 모르는 채로 온전히 행복만 누리며 살아가도록 오스트레일리아에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그러나 주인공 앞에 또 다른 선택지가 나타난다. 프록시마센타우리의 외계인의 도움을 받아 태양계를 탈출하는 것. 세상이 망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편안하고 행복한 무지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위해 입을 다무는 사람들. 거대한 기만일 뿐인 유토피아를 떠나 이어질 미래를 위해 탈출선에 올라타는 사람들. SF의 매력이란 이런 것 아닐까. 극한의 세계에 독자를 떨어뜨려놓고 질문을 던진다. 확실하지만 찰나 같은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 쓰라리지만 투명한 진실을 선택할 것인가?
다양한 단편 타임 루프물을 봤지만 '콜러스 신드롬'은 촘촘하고 정교하게 잘 짜인 개연성, 그리고 타임 루프를 통해 사라져 간 인물들과 현재 시간을 살아가는 인물들과의 관계성을 잘 표현한 소설이었다. 만난 적도 없는, 나와는 다른 시간선을 살아간 또 다른 나에게 느끼는 이 알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오직 SF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소설집에서 정말 재미있게 읽은 작품 중 하나로 남을 것 같다. 밤하늘 아래 뛰어노는 윤하와 현아와 유나를 떠올렸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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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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