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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se57
- 작성일
- 2021.7.11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 글쓴이
- 천선란 저
안전가옥
뱀파이어 로맨스를 이 길고 덥고 지겨운 여름밤에 읽다니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것인가? 낮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읽었고 밤에는 에어컨을 빵빵히 틀어넣고 서늘함을 마음껏 즐겼다.
천선란 작가의 작품은 "무너진 다리" 이후 2번째인데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무너진 다리" 초반의 복잡함을 이겨내니 100페이지 이후부터 꽤 재미있게 달렸기 때문에 작가의 특이한 이름 석자를 잘 기억하고 있다.
책을 맨 처음 펼치면 날개에 작가 소개가 짧게 나오는데 이 때부터 심상치가 않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세상을 꿈꾼다. 중략. 모호한 소설을 쓰고 있다."
어쩌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작가가 있을까? 인간이 주류인 지금 세상이 동식물이 주류가 되려면 멸망이 와야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요즘 트렌드는 멸망과 낫닝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뱀파이어가 되었건 구미호가 되었건 인간 그 이상의 능력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주인공이 나온다면 두 팔 벌려 환영이다. 이미 평범한 인간 주인공은 지겨운 더위와 습한 여름밤에 함량미달.
이 소설에는 어떤 이유에서든 뱀파이어에 홀린 여성 셋이 등장한다. 형사인 수연, 철마재활병원 간호사인 난주, 뱀파이어 헌터 은경. 세 사람은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내지 못했고 성인이 된 지금도 꽤나 외롭고 사회와 겉도는 삶을 살아간다. 외로운 인간의 피가 눈물을 속으로 삼켜서 숙성된 와인처럼 더 맛있다나?
덕분에 외로운 인간을 노리는 뱀파이어가 접근하기 딱 좋은 조건을 갖게 된 여성 주인공들에게 밤에 찾아오는 뱀파이어는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어느 날부터인가 난주가 근무하는 철마재활병원에서는 자꾸 노인들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서가 발견되었고 다들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정황 탓에 자살로 치부되지만 시체를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하다.
목덜미와 어깨에 난 두 개의 구멍, 마치 뱀에게 물린 것 같은 그 이상한 자국은 자살로 설명될 수 없다. 21세기에 뱀파이어가 존재하냐 마냐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를 비롯 독자들은 그냥 이 소설이 사람을 미치도록 홀리는 그 피부가 눈처럼 희고 새빨간 입술을 가진 아름답고 서늘한 뱀파이어 이야기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아마 평소 뱀파이어나 구미호 같은 낫닝겐(사람이 아니거나 초능력을 가진 존재가 주인공인) 소재를 좋아한다면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역시 마찬가지로 끌릴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완다인데 진정 로맨스라고 부를 만한 사랑은 완다와 여성 뱀파이어인 릴리 사이에서만 있었다. 뭐.. 굳이 다른 캐릭터들도 찾아보자면 뱀파이어 그레타와 형사 수연, 수연과 그녀가 동경했던 은경 선배, 난주와 뱀파이어 울란 사이에 어떤 강한 유대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를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좀 멋적은 감이 있다.
사랑의 범위를 아주 넓힌다면 모르겠지만 난주와 울란은 서로 이용하는 비즈니스 공생 경제 같은 사이였고 수연과 은경 선배는 같은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마음과 말이 잘 통하는 선후배, 그레타와 수연은 아직 호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재밌는 건 그나마 남녀 사이라고 할 만한 건 난주와 울란 정도이고 나머지는 전부 여성 캐릭터들인데 그런 허들 따위 가뿐히 뛰어넘는 뛰어난 장치가 있다.
바로 그녀들의 상대는 뱀파이어라는 것. 뱀파이어를 인간이 나눈 성별의 범주에 집어넣은 것도 우스꽝스럽다. 그들은 아주 가끔 인간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먹이로 여길 뿐이다. 제 3의 성이라고 해도 좋고 처음부터 종(種)이 다르고, 수 백년 혹은 그 이상의 수명을 가진 그들을 길어야 겨우 80~100년 살다가는 인간과 1:1로 비교할 수 있을까?
소설을 다 읽어도 왜 릴리가 완다를 떠났고 어떻게 갑자기 돌아오게 된 것인지 그 둘의 미래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두 사람의 모호한 사랑과 다른 뱀파이어가 저지르고 다니는 살인사건, 그걸 수사하는 수연, 살인이 일어나는 장소인 철마재활병원에서 불법을 저지르며 살 수 밖에 없는 난주 등이 서로 얽히면서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과 그걸 방치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었다면 불행해지지 않을 사람들이 넘쳐난다. 다른 인물보다 특히 완다가 안타까웠는데 그녀는 어린 시절 외국으로 입양되었고 사춘기 한창 예민하고 외로울 때 겨우 사귄 단 하나의 친구가 뱀파이어 릴리였건만 그게 불씨가 되어 다른 사악한 뱀파이어를 집에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야기는 이제 중반인데 아무래도 중간에 뚝 끝난 느낌이 든다. 울란이라는 악당 하나 죽인다고 뱀파이어 족속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시 만난 완다와 릴리의 중간과 뒷이야기 또한 궁금하다. 작가님이 여력이 있다면 후편을 써서 좀 더 자세히 풀어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솔직히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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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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