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공연등

천영애
- 작성일
- 2014.1.15
[Blu-ray] 아쉬람
- 글쓴이
- 디파 메타 / 리사 레이, 존 에이브러햄, 사랄라, 심마 비스워스,
에스와이코마드
'아쉬람'이라는 영화는 'water'이라는 원제를 우리나라에서 상영하면서 바꾼 제목이다. 아쉬람은 인도의 수행공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인도과부들이 모여사는 공간을 의미한다. 인도에서 과부가 되는 길은 여러가지다. 과부가 되는 길이라니, 이 엄청난 모순의 언어는 그러나 인도에서는 마치 만들어지는 것 같은 운명이다. 뻔히 알면서도 가는 길,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인도에서 과부가 되는 길은 부부가 함께 살다가 남편이 먼저 죽어서 되는 경우도 있지만 죽을줄 뻔히 알면서도 돈 문제로 딸을 팔아먹는 경우, 그러니까 미리 예정된 과부의 길을 가는 경우도 있다.
영화 포스트에서 보는 것처럼 어린 아이, 여덟살이라던가, 이 아이가 바로 그런 경우다. 아이(쭈이야)는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나이 든 남자와 결혼을 하고 시댁으로 가던 중 길가에서 남편의 죽음을 맞는다. 겐지즈 강에서 남편의 시신을 화장하는 동안 쭈이야는 낯익은 풍경을 보듯 그것들을 멍하니 본다. 그녀에게 죽음이란, 특히 남편의 죽음이란 너무 낯설다. 아니 남편이란 존재 자체가 이질적이고 부조리하다. 그녀에게 결혼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쁜 옷을 입는 것일 뿐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넌 이제 과부란다'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요?'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제 쭈이야는 과부들이 입는 흰 사리를 입고 머리를 자르고 아쉬람으로 들어간다. 승려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길에서 일어난다.
'과부는 죽을 때까지 자제하고 수절해야 한다.
남편에게 불충한 여인은 자칼로 환생하게 된다.
정숙한 아내는 남편이 죽으면 수절해야 한다.'
-힌두교의 마누법전 중에서-
남편이 죽으면 자신도 반은 죽은 것이라는 힌두교의 교리에 따라 이제 그녀는 신부의 그림자를 밟을 수 없고, 뛰어 다녀서도 안되고, 구걸해서는 안되며, 기름에 튀긴 음식도 먹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공간은 언제나 부조리로 넘쳐난다. 힌두교의 수행 공간인 아쉬람에는 여신처럼 아름다운 18세의 깔리야니가 있는데 그녀는 이 아쉬람의 원장인 마두에 의해 매춘을 하고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매춘도 허용된다는 것이 마두의 논리다. 마두 뿐만 아니라 아쉬람의 모든 과부들은 깔리야니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깔리야니의 매춘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면서도 그녀를 무시한다. 이 지독한 인간의 이기심.
그런 깔리야니에게 운명처럼 사랑이 찾아온다. 간디의 추종자로 막 캘거타에서 돌아온 나라얀이라는 귀족 청년이다.
나라얀과 함께 나라얀의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강을 건너던 깔리야니는 나라얀의 아버지가 바로 자신이 매일 밤 매춘을 하러 갔던 그 남자인것을 알고 배를 돌린다. 다시 아쉬람으로 돌아온 깔리야니, 그런 깔리야니에게 원장 마두는 다시 매춘을 시키고 자기에게는 다시 지난날이 삶이 되풀이될 것을 예감한 깔리야니는 강물로 스스로 걸어들어간다.
아쉬람에는 샤꾼달라라는 신심이 독실한 여자가 있는데 그녀는 깔리야니의 죽음을 본 후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남을 느낀다. '신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신'이라는 간디의 연설에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그녀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간디를 따라 함께 가는 나라얀에게 쭈이야를 맡기며 아이를 간디에게 보내 줄것을 부탁한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힌두교의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에는 '진흙 속에 살지만 범접할 수 없는 연꽃처럼 살라'란 구절이 있다. 이 장면은 바로 깔리야니의 삶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는 제목처럼 자주 물이 등장하는데 물은 탄생과 죽음, 정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인도인에게 물은 정화의식을 치르는 성수이기도 하고, 죽어서 떠내려가는 순환의 의미가 깊다. 깔리야니가 죽을때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몸의 정화를 기원하기도 하고, 다른 세상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떠오른다.
'2001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도에는 3400만명이 넘는 과부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아직도 2000년전에 쓰인 마누 법전에 따라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고 있다.'
다음 세상에는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라는 아쉬람의 여자들처럼 인도의 여성들, 아니 힌두교의 종교아래 있는 여성들의 삶은 비참하다. 남자들은 무엇이나 할 수있지만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종교의 교리가 인간의 삶을 속박하고, 남자들은 그 교리에 따라 무한한 권리를 누린다. 우리가 믿고 있는 신, 나는 개인적으로 신은 인간이 만든 관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수를 희대의 사기꾼이라면 몰매 맞을라나? 그러나 그것이 내가 종교를 생각하는 관점이다. 어디 예수뿐인가. 동학의 초대교주인 최제우도 원래는 사기꾼이고 건달이었다. 그런 사람을 주변의 능수능란한 수단가들이 신격화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교리 또한 시대의 필요에 따라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기 위해 쓰여졌을 것이다. 종교의 경전을 냉정하게 분석해 보라. 거기엔 바로 지배자의 논리가 쓰여 있다.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백성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반역의 기질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지배자는 경전에 의해 피지배자를 억압하고, 남성들은 경전에 의해 여성들을 억압해 왔다. 단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할뿐인 신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므로 '신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바로 신'이라는 간디의 언사는 의미가 깊다. 인도인의 그 무지스런 삶, 인도인은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신이 중심인 사회다. 인도인의 사유는 바로 신적인 사유다. 거기에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지배할 수 있는 자리에 놓인 사람들뿐이다. 아쉬람에 모인 여자들은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된 것이 아니라 나라얀의 말처럼 돈이 과부를 만든 것이다. 여자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축내고 옷감을 축내는 소모적인 생물로 보기 때문에 먹이를 주고 옷감을 주는 남편이 없으면 여자는 사람이 아닌 한갓 미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영화는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감동적이었다. 쭈이야의 천진난만함, 깔리야니의 아름다움과 슬픔, 나라얀의 핸섬함, 샤꾼달라의 인간적인 행위, 아쉬람에 모인 과부들의 부조리한 삶등은 영화를 보는 내내 또 다른 한 여자인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부조리한 삶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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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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