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 어른 동화

송영
- 작성일
- 2020.6.26
기억 1,2 세트
- 글쓴이
-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
열린책들
주제와 변주가 낳은 영혼의 기억
『기억』 1, 2 세트
감상포인트 1. 또 하나의 변주곡을 소장하는 기쁨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최신간 소설 『기억』의 번역 초판 한정판을 소장하는 행운을 얻었다. 작년 여름에 출간한 소설 『죽음』의 표지가 흰색 바탕에 한정판 야광이었다면, 이번 한정판의 표지는 검은색 바탕에 각도에 따라 사람의 얼굴과 나비의 움직임이 다르게 보이는 신비한 느낌의 렌티큘러 표지이다.
책의 제목과 표지는 독자의 구매 욕구를 불러오는 첫 번째 관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온라인 주문이 생활화된 상황에서는 스마트폰의 민감한 터치와 컴퓨터 화면을 달리는 스크롤 마우스의 질주에서 '일단 멈춤'이라는 선택을 받는 게 관건이다. 그러한 선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책의 제목과 표지’라는 데는 대체로 이견이 없을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대다수의 작가와 출판사들이 표지에 상당한 정성을 쏟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단, 이 책의 표지는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듯하다. 한정판 이후의 표지도 꽤나 마음에 든다. 더불어 전통적 사철방식으로 제본되어 편안하게 책을 펼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보관도 가능하다. 한 마디로 소장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러면 내용은 어떨까? 사실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이름만으로도 검증된 작품이 아닐까? 여기에 개인적 의견을 더하자면 ‘문학적 다양성’을 생각하게 해주었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표지로 이야기를 꺼낸 만큼 표지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볼까 한다. 표지에는 화려한 색깔을 뽐내는 나비가 있다. 표지의 각도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자세히 관찰하면 날아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애벌레한테는 끝인 것이 사실 나비한테는 시작이죠.」
이 두 구절이 가슴을 때린다. 그의 생각이 결정체인 이 문장들이 책으로 후세에 읽히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그가 사람들에게 잊히면, 내가 그의 생각을 전하지 못하면, 두 문장으로 승화된 그의 생각은 헛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는 애벌레이고 나는 나비인지 모른다. 나에게는 날아올라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 (1권, 371쪽)
처음 표지를 접할 때는 그저 신비스럽다고만 생각했는데, 소설을 읽다보니 애벌레의 삶을 끝내고 날아올라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나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현재 나의 삶도 나비의 삶일까?
베르나르의 소설을 읽다 보면 늘 기발한 작가만의 전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왠지 늘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2권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눈에 번쩍 띄는 문구를 발견했다.
‘주제와 변주’
베르나르의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 홀린 듯한’, ‘뭔가 비슷한 듯한데 새롭단 말야!’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은 느낌이다. 그렇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의 주제는 언제나 한결같았지만, 매번 새롭게 진화하고 있었다. 작가만의 독특한 상상력의 조합으로 같은 뜨개질을 하면서도 한 땀 한 땀의 간격과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문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촘촘하게.
감상포인트 2. 현생과 전생의 기억 속으로
소설의 주인공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32세의 역사 교사, 르네이다. 르네는 우연히 최면술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전생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최면에서 깨어난 후에도 너무 참혹했던 전생으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거리를 배회하다 사람을 죽게 만든다. 물론 정당방위였지만, 르네는 자수할까 말까 망설이면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르네에게는 111개의 전생이 있다. 르네가 처음 만나게 된 전생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특공 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한 병사였다. 최면을 통해 전생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르네는 처음엔 자신의 전생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것은 최면사 오팔이 최면술을 이용해 거짓으로 만들어낸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둘 밝혀지는 기록들을 통해 르네는 자신의 전생이 실재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전생으로의 여행.
르네는 다양한 시대, 다양한 모습의 전생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서도 전생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바로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르네가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역사 교사이기 때문이다.
역사 교사인 르네는 고대 로마의 갤리선 노잡이였던 제노를 만날 때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 역사를 기억해 내고, 캄보디아 승려였던 피룬을 만났을 때는 1975년에서 1979년까지 담나티오 메모리아이의 극단을 보여준 캄보디아 독재자 폴 포트를 기억해 낸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생이었던 피룬을 고문하는 악명 높은 크메르루즈 장교 두치도 기억해 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틀란티스인, 게브를 만나면서 신화 속 전설이라고만 믿었던 아틀란티스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경찰의 수배를 피해 이집트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르네는 전생들을 만나면서 ‘게브’의 삶을 제외한 이전의 생은 하나같이 슬픈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보물과 함정이 공존하는 현생이 가장 축복받은 삶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잠재능력과 현생에 부여된 삶의 의무도 인식하게 된다.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져 가는 르네는 현생의 기억으로는 찾지 못하는 역사적 진실을 전생과의 접속을 통해 찾아내게 된다. 그런 그에게 부여된 삶의 의무는 역사적 진실을 회복시킬 의무였다.
그는 영웅이었어. 영웅이라고 꼭 좋은 건 아니야. 제일 먼저 죽으니까. 끝까지 살아남는 자들은 비겁한 자들, 보신만 생각하고 어떻게든 전투를 피하는 자들이야.
그런 자들이 자식을 낳고 천수를 누리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자들의 입을 통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돼. 이미 세상에 없는 영웅들은 그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는 거지. (1권, 52쪽)
“순전히 게으름 때문에 과거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과거의 실체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이나, 결국 똑같이 과거를 반복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해요.” (1권, 66쪽)
과연 르네는 역사적 진실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아틀란티스인의 존재는 밝혀낼 수 있을까?
감상포인트 3. 문학적 다양성의 발견
이번 소설 역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천재적 상상력에 기인한 이야기의 전개가 눈에 띈다. 그런데 르네가 만난 전생 중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인물들이 있다. 물론 역사적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가만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소설임은 틀림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판타지 장르로 분류되는 이 소설 속에는 역사적 사건이 제법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가장적 역사소설로 보아야 할까?
최근의 역사소설이나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과 사건을 바탕으로 하되 역사적 사실의 골격만 갖춘 채 상당 부분 재가공하거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예도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류의 소설을 순수하게 역사소설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어찌 되었건, 이런 경우 원천적 소재는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 소설 또한 그런 느낌이다. 전생의 배경 설정을 원천적 소재로 끌어오면서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조합해 완전히 새롭게 구성한 듯하다.
예를 들면, 르네 바로 이전의 전생은 111번째 생의 피룬이었다. 피룬은 르네의 전생으로 육화된 또 다른 르네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피룬이 살았던 시대를 1975년에서 1979년까지 4년간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 포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주가 통치하던 시대로 설정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 모두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악명 높은 크메르루주 장교 두치라는 인물도 실존 인물이다. 피룬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나, 피룬이 찍힌 사진이나 살았다는 흔적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기록말살형 또한 실재했던 역사적 기록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작가가 설정한 주인공의 직업과 소설의 흐름은 최고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르네의 첫 번째 전생 게브의 삶은 어떤가? 게브는 만이천 년 전의 전생인 아틀란티스인이다. 아틀란티스의 실재 여부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저 신화 속 전설이라고만 하기엔 아틀란티스의 실재를 주장했던 플라톤의 기록뿐만 아니라 아틀란티스의 실존 증거들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실재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은 역사적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런 빈틈을 너무도 잘 노린 것 같다. 기발하게도 원천적 소재는 부족한 역사적 기록에서 가져오고 역사적 기록의 여백에는 작가적 상상력을 촘촘하게 채워나갔으니 말이다.
공백이 아닌 여백의 활용.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닌, 유에서 또 다른 유를 창조하는 작가만의 변주 능력이 잘 가미된 소설! 그저 판타지 소설이라기보다는 보다 발전된 과학기술이 동원될 경우 하나둘 밝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미래예측소설 같다는 느낌도 든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 소설은 주로 과거와 전생의 이야기지만 작가는 소설 속 대화를 통해 오늘날의 여러 문제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가령, 프랑스 바칼로레아 시험의 한계라든지, 악명높았던 크메르루주 정권이 아니더라도 천의 얼굴을 가진 전체주의 사상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뉴미디어의 노예가 된 미래세대에 대한 불안 등.
한 학생이 말꼬리를 문다. “선생님 얘기를 듣고 교과서에 없는 엉뚱한 얘기를 적으면 바칼로레아에서 떨어질 텐데요.”(1권, 71쪽)
“앞으로 교양 없고 무식한 다음 세대가 도래할 일만 남았어. (중략) 광고와 인터넷에 휘둘리는 세대 말이야. 그들은 자기 생각도 없고 그걸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없어. 이미 만들어진 생각에 그저 동조할 뿐이지.” (1권, 77쪽)
전체주의는 관심을 끌기 위해 천의 얼굴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검은색 파시즘이나 빨간색 공산주의나 초록색 광신주의나 결국 매한가지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해줘요. (1권, 370쪽)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이 소설을 통해 우리 안에 내재한 무한한 잠재능력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거듭된 생을 통해 영혼이 기억하는 우리의 잠재능력은 여전히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작가는 소설 속에서 <나는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야>(2권, 348쪽)라고 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전생이며 나의 영혼이 ‘다음 생에는 이렇게 태어나고 싶다’라고 주문하고 선택한, 바로 우리 자신의 영혼이 선택한 삶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책의 표지에 있는 날아오르기 위해 새 삶을 부여받은 나비에게 다시 눈길이 간다.
이 소설은 판타지적 요소의 흥미뿐만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읽을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소설을 읽고 난 후 장르소설의 시작과 끝의 경계는 어디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장르소설의 경우, 대체로 문단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문학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존중하고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곁에는 대중성과 문학성을 골고루 갖춘 장르소설도 제법 많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그 예일 것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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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