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후안
- 작성일
- 2012.11.30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글쓴이
- 정진홍 저
문학동네
순. 례. 자
산티아고 가는길 900KM를 걷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다. 단순히 거리가 멀어서, 아무나 쉽게 걷기 힘든 길이어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순례자라고 부를까? 900킬로미터라는 거리는 좁은 반도에 갇혀 지내는 우리네 시각이나 관념으론 단순히 서울 부산간 왕복에 해당되는 거리로 짐작케 하는 추상적 개념일뿐. 왜일까? 왜 그들을 순례자라고 부를까? 그건 그 길이 그냥 유람삼아 휘적휘적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길을 걷는 다는 건, 그것도 혼자서 몇날 며칠을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걷는 다는 것은 순례자가 느끼는 고행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발자국 소리와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벗 삼아 걷는 그 길에서, 아마도 살아온 과거의 회상들이 떠오르고. 개중엔 잊고 싶은 쓰라린 기억, 회환과 후회의 눈물, 아쉬움과 원통함과 용서와 관용의 기억들과 함께 부대끼며 걷는 여정이리라. 스스로를 돌아보며 가장 객관적인 시각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여정, 내면의 울림을 듣는 여정, 그래서 그 길은 순례자의 길이고 그래서 그 길을 걷는 자는 순례자인 것이다. 인생의 순례자.
인문학자이며 저술가이고 학자이기도 한 작가 정진홍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 섰다. “정진홍의 900킬로미터”라는 소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 책은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은 여정의 기록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었고. 그 기록을 남겼다. 순례자의 그 길을 관광 삼아 떠난 사람, 그저 길의 소개에 그친 사람, 아니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떠난 사람, 또는 여럿이 어울려 무슨 유람을 떠난 것처럼 그 길의 여정을 소개한 사람은 많았다. 지금도 서점에 진열된 여행기나 인터넷상의 자료도 그처럼 그 길을 다녀왔음을 과시하기 위한 자료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 길은 그렇게 즐기는 길이 아닌 힐링의 길이며 치유의 길이다. 깨달음의 길이며 거듭남의 길이다. 진정한 깨달음의 길인 그 길을 온몸으로 걸은 기록은 이 책이 처음이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고 자신의 내면에 거듭되는 물음에 답을 하며, 목숨을 내놓고 마음으로 걸은 길, 그런 기록은 처음이다. 그래서 그는 고백한다. 그 길에서 돌아와 몸무게도 10KG이나 줄었지만 가장 많이 빠진 것은 마음의 비계라고...
그동안 인문학적 깊이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써내려간 그의 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의 글과 강의는 언제나 독자와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1,2,3》은 동서양의 고전에서 만나는 수많은 위인들의 예화를 빌어 현 시대의 경영이 나아가야할 지표를 제시해 주었고, 《정진홍의 사람공부1,2》는 자신의 삶에 있어 치열함으로 승부하여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룬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고전을 통한 예화와 우리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겨진 얘기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기엔 충분했다. 나도 그의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얘기에 동감했고, 그들의 삶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그 책을 통해 지금도 가장 한국적인 한의 목소리로 가슴을 울리는 노래를 들려주는 장사익 선생님이 늦은 나이에 노래를 시작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인생역정이 있었으며,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지냈는지도 알게 되었다. 또한 레옹의 마틸다 역을 통해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스타워즈 시리즈에서는 파트메 역을 통해 스스로를 부각시키고, 블랙스완을 통해 그 연기의 절정을 보여준, 그 역으로 2011년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를 향한 그 완벽을 추구한 열정도 알게 되었다. 블랙스완을 통해 본 그녀의 미친 연기가 단순한 우연히 아닌 그녀의 치열한 내면의 고뇌와 열정의 산물이었고, 어쩌면 하버드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의 전공조차 이역을 맡기 위한 운명적인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착각도 들었다. 그의 연기에 대한 집요함은 결과를 떠나 그 영화를 보고 내가 받은 충격을 충분히 해명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가 그의 저서를 통해 전해준 모든 이야기는 그 자신의 얘기가 아니었다. 그가 가진 독서력과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동서양 고금의 많은 이야기를 조목조목 모아서 우리에게 들려주었을 뿐이다. 단순한 전달자였다. 자신의 얘기가 아닌 그 누군가의 얘기였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라고. 그러한 얘기가 감동외에 우리에게 주는게 무엇인지. 그런 독자들의 의문을 눈치 챈 것일까? 인문학의 날카로운 칼끝으로 우리를 향해 현란한 칼춤을 추던 그가 그 인문학의 칼끝을 자신을 향해 들이댔다.
그 길은 시작부터 녹녹치 않았다. 변화무쌍한 날씨로 인해 죽음의 고비를 오르내리며 시작한 그의 여정은 우리네 삶과 닮아있다. “안주는 안락사다”라는 치명적인 문장으로 시작한 그의 여정에 관한 기록은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렸다. 저자는 길 위에서 자신의 생의 철학을 녹여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풀어냈다. 스스로를 향해 들이댄 저자의 인문학의 칼끝이 외려 나의 가슴을 훓고 지나갔다. 그가 느낀 지나온 세월에 대한 고통과 회환의 얘기들은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 구절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길 위에 선 그는 바로 나였고, 우리였다. 그의 고통과 울음, 통곡과 회환도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었다. 문득 문득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나인 듯한 착각에 빠졌다. 중년이 되어 느끼는 삶의 고민들을 스스로의 얘기로 엮어나감에 마음으로부터 공감을 느꼈다. 그동안 작가가 글을 통해 제시한 인문학적인 생각들이 이제는 남이 아닌 나를 향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생각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생각임을 느끼게 해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그 길을 걷는 작가를 통해 온전한 나를 찾을 수 있었고, 저 가슴속 깊이 잠들어 있는 울음도 토해보고, 어느 순간 마음의 응어리가 치유되는 후련함도 느꼈다.
가끔 혼자서 산을 찾는다. 어느 정도 길을 걷기 시작하면 산티아고에 나선 순례자들처럼 자연의 소리가 나의 저 깊은 마음속 심연에 잠들어 있는 추억의 조각들을 끄집어 올린다. 그 속에는 미련, 후회, 회한, 미움, 증오 ,시기 등 찌꺼기 같은 아프고 슬픈 기억들이 장마철에 밀려온 부유물처럼 기억의 밑바닥에서 떠 올라온다. 오래전 잊어버렸던 기억들까지 덩달아 떠올라 마치 그동안 살아온 삶을 기록한 한편의 다큐를 보는 듯이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아온다. 그리고 질문한다. 나는 잘살고 있는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한다 해도 똑같은 길을 가고 똑같은 결정을 내릴 것인지. 때로는 그 기억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숨을 쉬기도. 미처 하지 못한 일과 잘못된 결정에 대한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찢어질 듯 아프기도 하다. 작가도 산티아고를 걸으며 같은 경험을 했으리라. 마음한구석에서 나를 향해 속삭인다. 저 끝까지 원했던 곳까지 가지 않아도 누구도 너를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라고. 또 한편에서는 이까짓 것도 이겨내지 못하면 세상에서 무엇을 하겠냐는 내마음속 또 다른 투쟁을 뒤로하고 정상에 오르는 순간, 세상이 발밑에 있음이 기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유혹을 이기고 원했던 곳에 서있음이 기쁜 그 순간. 삶은 또 다른 시작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아마 작가도 산티아고 길의 순례를 마치고 같은 마음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곳에 서는 그 순간 세상의 잡동사니를 버리고 소망, 꿈, 화해, 사랑, 모험등이 마음속에 가득 차기를.
앞으로도 작가는 글과 강의로 우리를 매료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갖는 힘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그는 이미 그동안 자신이 알던 인문학의 지식을 자신의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체화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누구도 그의 얘기에, 그가 들이대는 인문학의 날카로움이 살아있는 그 서슬퍼런 칼날앞에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그 칼을 자신을 향해 들이댔고, 인문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과의 그 어려운 싸움에서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진정한 순례자다. 삶에 있어서 그리고 그의 여정에 있어서. 그리고 그는 스스로의 승리자다. 승리자로서 마음의 비계를 덜어낸 그가 앞으로 우리에게 들려줄 말과 글이 기다려진다. 그만큼의 삶의 비계를 덜어낸 그의 그 긴 여정이 우리에겐 어떤 감동으로 또 다가올지.
어차피 인생은 혼자서 가야할 길, 그 길에서 닥치는 수많은 어려움은 산티아고 가는길에서 작가가 만난 어려움과 닮아있다. 그래서 우린 그 길을 걷는 자들을 순례자라 얘기하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순례자. 자신의 돌아보고 올곧이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걸어야 할 순례의 길. 그 길은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다. 인생이란 길은 삶이 우리와 함께 하는 한 가야할 길이다. 단 한순간도 멈추지 말고, 기어서라도 가야할 길이고, 나아가야 할 길이다. 그래서 그 끝을 봐야하는 길이다. 순례자의 여정의 끝에서 한없는 자기 위안의 눈물을 흘렸을 작가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본다. 그 길에서 얻어진 깨달음은 바로 우리의 삶에서 언제나 부딪치는 고난을 해결하는 최고의 처방전이다. 우리의 삶의 끝인 인생의 끝에서 지나온 여정을 되돌아볼 때 마음에 남긴 미련과 회환의 눈물이 줄일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 삶은 나름대로 잘 살아온 삶은 아닐까.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삶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은 아닐까. 어쩌면 길 위에 선 인문학자 정진홍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위안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게으르지 말고 안주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고, 단 한순간도 쉬지 말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 끝을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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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