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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1.4.16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윤휴
- 글쓴이
- 이덕일 저
다산초당
안녕하세요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는 깡꿈월드입니다.
때론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조선시대에 체면이 아닌 실리를 중시여겼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좀 더 발전할 수 있었을까?
왕과 사대부, 그리고 사관마저 지우려했던
622. " 금기어가 된 조선유학자, 윤휴" 입니다.
사실 나는 "윤휴" 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
물론 내가 모든 유학자들을 알순 없지만
이정도의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라면,
이정도로 나라를 위했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처럼
서인과 등을졌던 "윤휴"의 이름은 쉽게 찾아볼수 없다.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형당한 당대 최고의 선비, 윤휴.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조선의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위해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로 향했다.
청 태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릴때
어린 윤휴는 오늘 날 치욕을 잊지 않겠다며
"북벌대의"를 자신의 뼈에 새겼다.
그러던 어느 날 효종이 세상을 떠나게되고,
효종의 아버지 인조의 계비로 형식상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는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지가
논쟁의 중심에 떠올랐다.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부모는 장자상은 3년,
둘째 아들부터는 1년복을 입어야 했는데
송시열과 서인 세력은 소현세자가 적장자이고
효종은 차자이기 때문에 1년 입는 상복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휴와 남인 세력은 왕통을 이은 효종이 장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시열 등을 비롯한 서인들이 조선 국왕을 임금으로
여기고 있다면 간단히 풀릴 문제였지만,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에게는 국왕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명 황제의 신하일 뿐이었다.
이때부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세력과 등을 지기 시작한
윤후는 숙종의 명을 받고 조정에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나이 58세 때의 일이다.
윤휴는 북벌대의를 펼치고자 애를 썼지만 그와
다르게 사대부들은 말로는 북벌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말 뿐인 사대부 대신 윤휴가 주목한 세력은
바로 행동하는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북벌에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이 나라는 사대부만의 나라가 아니고
백성들 자신의 나라이며, 북벌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백성들 자신의 일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했다.
이런 생각에 "지패법과 호포법"을 주창했지만
이는 기득권을 타파하는 법이었므로 양반들의 격렬한 반발만 불러 일으켰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미 유학자들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성현의 말씀을 달고 살지만 행동은 성현의 말씀과
정반대로 사는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언행일치와 지행합일을 추구하던 윤휴 같은 사대부는
극소수에 불과했기에 조선은 계속해서 썩을 수 밖에 없었다.
권리만 누리고 의무는 방기하는 사대부들의 계급이기주의에,
능력이 아니라 신분을 따지는 신분제도에.
이대로 윤휴를 둔다면 분명 자신들의 이기적인 마음과
욕심이 후대에 들통날꺼라 생각한 서인들은 어떻게해서든
그의 목소리를 끊어내야만 했다.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제거해야 할 만큼
윤휴는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결국 모두 잘 사는 삶을 꿈꾸던 윤휴는 세상을 떠났고
주인을 잃어버린 그의 발자취들은 송시열이란
이름표를 단채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만약 그때 숙종이 윤휴의 말을 새겨 들었다면,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만 급급하지 않고
조선의 미래를 생각한 학자들이 있었다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한번이라도 되돌아봤다면,
조선의 마지막은, 지금 우리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이 책은 다산북스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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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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