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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chocolate
- 작성일
- 2024.2.15
작별들 순간들
- 글쓴이
- 배수아 저
문학동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일평생 단 하나의 헌책방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각각 다른 장소에 있는 그의 서재 세 곳은 책으로 가득하며, 그때그때의 운명과 우연에 따라, 여행과 체류 계획에 따라 각 서재의 책들을 재배치 하는 일에 그는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는 자동차 트렁크에 커다란 여행가방을 싣고 한 서재에서 다른 서재로 떠난다. 어디로 떠나든 여행가방에는 다른 물건은 거의 없이 오직 책이 가득하다. 그의 여행가방은 그 자체로 작은 도서관이다. (…) 그의 여행가방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충분히' 클 수가 없다. 헌책방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할 경우, 그 책을 이미 갖고 있다 할지라도 또다시 구입하는 데 그는 주저함이 없다. 붉은 뺨의 청년이 1972년에 구입한 책과 이후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이 21세기에 다시 발견한 책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 권을 이 서재에, 다른 한 권을 다른 서재에 옮겨놓기 위하여 기꺼이 여행을 떠난다. 놀랍게도 나는 일생 동안 그런 사람을 몇몇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끌렸고 그들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책과 여행가방으로 대표되는 어느 한 세대의 마지막을 살았던 사람들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묽은 잉크와 같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숲 뒤편으로 석양빛이 섞인 어두운 구름이 덮여 있었다. 들판 가장자리 사냥꾼의 감시대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듯 흐릿해져갔다. 풍경은 고요히 얼어붙은 그림 같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 정물이었다. (…) 내가 계속해서 쓰기를 바란다고 당신이 말하는 것이 오래오래 내 귀에 남았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영영 작별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고 내가 외치듯이 말했다. 갑작스러운 정적이 우리를 둘러쌌다. 우리는 숲안쪽에 있었다. 우리는 발목이 없다. 나무들은 안개의 베일을 걸친 뼈들이었다.
묽은 잉크와 같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숲 뒤편으로 석양빛이 섞인 어두운 구름이 덮여 있었다. 들판 가장자리 사냥꾼의 감시대가 구름 속으로 사라지듯 흐릿해져갔다. 풍경은 고요히 얼어붙은 그림 같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 정물이었다. (…) 내가 계속해서 쓰기를 바란다고 당신이 말하는 것이 오래오래 내 귀에 남았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영영 작별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고 내가 외치듯이 말했다. 갑작스러운 정적이 우리를 둘러쌌다. 우리는 숲안쪽에 있었다. 우리는 발목이 없다. 나무들은 안개의 베일을 걸친 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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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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