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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12.8.8
타력
- 글쓴이
- 이츠키 히로유키 저
지식여행
어느 중학교 정문 앞의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초등학교 6학년생의 절단된 머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잘린 머리의 입 안에는 "경찰 여러분, 나를 좀 멈춰줘.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어 죽겠어." 라는 쪽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후 이 살인자는 계속되는 살인행각과 함께 "마음만 먹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살인을 즐길 수 있다. 내가 일부러 세상의 주목을 모으는 것은, 지금까지 그리고 이제부터 투명한 존재로 있을 나를, 적어도 당신들의 공상에서만이라도 존재하는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라는 성명을 신문사를 통해 발표합니다.
마치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 일은 실제로 1997년 일본 효고현 고베시 스마구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의 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신기하게도 정말 마치 한 편의 소설과 같이 생생한 모습을 하고서 우리를 묘한 곳으로 인도하는 듯합니다. 소설처럼 살기를 바랬던 제 자신이 이토록 흉흉한 세상 안에서 실제로 살고 있구나를 느끼며 순간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자신을 '투명한 존재'라고 말했던 이 범인의 서글프고 아픈 문장을 바라보고 동정하는 마음,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결국 자신을 '사카키바라'라고 불러주길 바랬던 이 사건의 범인은 14살의 소년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말세'라는 말은 인류가 기억할 수 있는 역사의 가장 오래된 곳에서부터 끊임없이 우리 곁에 맴돌고 있었던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진정한 말세는 바로 지금이다. 이 징조는 세상이 망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농업의 발전, 과학의 발전, 의학의 발전을 이루며 지금 현재의 인류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누리고 풍요로운 듯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이츠키 히로유키는 실제로 우리는 가장 빈곤한 시대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한 연쇄 살인사건 뿐만 아니라 옴진리교 테러사건과 같은 흉흉한 사건이 연일 터지는 이 세상이, 그리고 고베 지진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이 세상이야말로 진정한 말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란 것이 무의미해진 세상입니다. 우리는 10년 뒤, 혹은 20년 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고, 꿈꿀 수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이 일, 그리고 현재 다니고 있는 이 회사가 내일 당장 사라질지도 모르는 판국에 미래를 예상하고 계획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미래에 대한 꿈을 품으며 은행에 저축해온 돈이 은행의 파산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TV의 올림픽 중계 방송에서 '아쉽게도 은메달'이라는 해설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현재 갖고 있는 직업이 자신만의 일이라고 여길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회사는 직원 한두 명쯤의 대체자를 손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투명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츠키 히로유키의 『타력』은 이토록 영혼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격려'가 아닌 '위로'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말없이 옆에서 그저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어줄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따뜻한 감동이 물결치는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무엇보다 또렷해서 이것은 이것이라고 단언하듯 말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낮은 곳에서 이 글을 '모범'으로 여기지 말고 '견본'으로 봐달라는 어조로 겸손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웃음을 유지하며 사람을 벨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사와 같은 모습의 글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100장의 이야기 속에서 모두 다 한듯해 보입니다. 결국 판단과 결정은 우리의 몫이지만 말입니다.
책은 굉장히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호넨, 신란, 렌조라는 일본 불교 사상가들의 말을 인용하며 그들의 말 속에서 현재를 살아갈 해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 중하나가 바로 이 책의 제목인 '타력'이란 것입니다. 우리를 이끄는 각종 힘들 중에서 '자력'이라는 어머니가 본인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타력'이라는 아이를 그녀 안에 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스스로를 너무 밀어붙이지 말라고 하며, 세상을 조금 다른 방향에서 조금 더 넓게 보라는 말을 합니다. 딱히 콕 찝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말입니다.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는 제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려운 이야기들인지라 저는 그런 이야기였다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이렇게 저자가 전혀 의도치 않았던 깨달음을 이 책을 통해 독자가 얻어가는 것, 이것도 일종의 타력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게 자기책임인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우리를 살게 하기도 하고, 의욕조차 생기게 해주지 않을 때도 있는가 하면, 또 생각지도 못한 용기와 투지를 가져다줄 때도 있습니다.
만일 언젠가는 '타력의 바람'이 불 거라고 믿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그 사람에게 타력이 찾아오고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도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도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계에 영원히 바람이 불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6쪽)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나 이외의 뭔가 커다란 힘이 내 삶의 방식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나 이외의 타자가 나라는 존재를 떠받치고 있다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꿔 말하면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커다란 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커다란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 했다는 생각은 얕은 생각으로, 그 밖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내 운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론도 아니고 숙명론도 아닙니다. 사람은 그것을 알 때 자기를 초월한 커다란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85쪽)
크게 웃고 크게 울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감정의 자유로운 진폭인 것입니다. 깊이 절망하는 인간만이 희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지독하게 고민하고 지독하게 번민하는 인간만이 진정한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120쪽)
은행이나 증권회사의 이익공여 사건은 사회적인 범죄입니다. 책임자에게는 공공의 적이라는 표현이 딱 맞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매스컴은 죽음을 통해 쉽게 용서해주는 식의 논조를 보입니다.
'주인님' 의식의 안일함 속에서 언제까지고 응석을 부리고 있을 수 있는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164쪽)
소설가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발언해야 합니다. 혼돈의 세계에 직면한 사실을 얼버무리며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닙니다' 하는 등의 기묘한 말을 하지 말고, 삶과 죽음의 큰 스토리를 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242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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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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