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

가을남자
- 작성일
- 2019.8.28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글쓴이
- 신영복 저
돌베개
젊은 시절에 나는 마치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논쟁에서는 칼과 같은 말로 상대를 찌르고, 나와 다른 사람은 견디지 못했다. 마치 날카로운 조약돌이 바람과 강물에 깎이듯, 오랜 시간 나의 이런 날카로움이 깎여져 갔다. 나의 날카로움 깎은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인생이라는 시간들, 삶에서의 여러 번의 실패, 좋은 사람들의 조언들이 있었다. 독서 역시 나를 깎고 다듬어 주었던 가장 큰 도구였다. 독서를 통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여러 인생들을 경험하면서 다른 인생들을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한 가르침에 겸허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그중에 한 권이 바로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20년도 훨씬 넘는 젊은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저자와 그의 책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이 책을 들고 읽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존경하는 한 분의 소개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느낀 반응은 저자의 겸허함이다. 서울대 출신의 당대의 엘리트이자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동안 감옥에서 세월을 보낸 저자의 이력 때문에 그에 대한 선입견이 강했다. 저자의 굽히지 않는 신념이나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분노 등이 터져 나오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순간 인생에 대한 겸허한 마음과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스한 마음을 접하고 당황했었다. 그는 감옥 속에서 타인의 잘못을 보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인생과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숱한 문제들과 정면 대결하는 긴긴 겨울밤을 좋아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하늘을 치달리는 잡념을 다듬고 간추려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하나하나의 일들과 만나고 헤어진 모든 사람들의 의미를 세세히 점검하는 겨울밤을 좋아합니다. 까맣게 잊어벼렸던 일들을 건져내기도 하고, 사소한 일에 담겨 있는 의외로 큰 의미에 놀라기도 하고, 극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알았던 일에서 넘치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만나고 헤어진다는 일이 정반대의 의미로 남아 있는 경우도 없지 않아 새삼 놀람을 금치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만나는 것은 매양 나 자신의 이러저러한 모습입니다." (P 75)
이와 함께 책 속에서 타인에 대한 저자의 따스한 마음을 접하게 된다. 감옥에서는 다양한 사람을 접하게 된다. 또는 감옥의 동료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의 처절한 삶도 듣게 된다. 깡패들의 착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매일 악다구니를 치며 싸우는 창녀의 삶. 징역 사는 남편의 옥바라지를 위해 몸을 파는 아내의 삶. 반대로 징역 사는 남편을 버리고 딴 살림을 차리는 또 다른 아내의 삶. 저자는 이런 사람들의 삶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는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며 그들의 삶의 위치에서 생각해 보려 한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내는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 무지하면서도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인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 83)
저자가 감옥에서 만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더 거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배운 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무시하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겸허하게 그들의 삶을 존중한다. 감옥 속에서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한탄하면서도, 타인의 인생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만은 눈물겹도록 따스하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 만 느끼게 합니다. - 중략 - 자기의 가장 가끼이 있는 사람들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P 93)
이 책을 읽은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보수와 진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권력을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싸움으로 치열하다. 이제는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들까지 존재하는 듯하다. 조금 더 나와 다른 상대를 이해할 수는 없을까. 신영복 선생의 사색이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이다. 각자의 감옥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기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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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