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살아 있는 괴담들의 밤

jakkajungsin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4.10.28

검은 잉크 속 같은 새벽, 의미를 알 수 없는 암호가 안개처럼 자욱해지는 새벽, 나는 지금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직 당신의 눈엔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영원히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쩌면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는 나의 모습을 드러내야 할지 고민해왔다. 그건 간단치 않은 문제였다. 우리 세계의 금기이기도 했지만, ‘왜 드러내려고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기 전에, 무엇보다 내 정체에 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내가 누구인가 하면 소설 속 캐릭터인데 활자 밖으로 마실 나왔다네’라고 말한다면, 단박에 어디서 미친놈 하나 나타났구나 싶지, 그 말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러나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없는 존재인 양 마냥 숨어 있자니 분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또 배우처럼 캐릭터를 갈아타는 일이야 운명이라니 어쩔 수 없겠지만, 모래알 같은 활자들로 이루어진 감옥 속에 갇힌 삶도 이제는 솔직히 지겹다. 소설 속 허구의 인물로만 살아온 시간이란 시작도 끝도 가늠 안 되는 우주와 같다는 사실을, 당신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랜 생각 끝에 드디어 나는 나를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우선,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머리가 아프다. 쉽게 말해, 일종의 캐릭터 정령이라고 해두자. 여러 작품에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를 연상해도 좋다. 나 역시 여러 소설가의 작품들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등장했다. 최근에는 김휘 작가의 소설집 『눈보라 구슬』에 수록된 「괴담 라디오」에서 지구지킴이로 등장했고, 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 「감염」에서 의심 많은 소설가로도 등장했다. 이전에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의사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로, 로버트 블록의 『사이코』에서 노먼 베이츠라는 인물로도 등장한 바 있다. 이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다. 원하는 작품과 캐릭터를 잡기란 쉬운 게 아니다. 캐릭터 정령들의 세계에서도 경쟁은 치열하므로.
그러고 보니 나는 괴담성 이야기들로만 옮겨 다닌 셈이다. 섬뜩한 공포에 동공이 열리고 심장이 화답하는 나의 오랜 취향 때문이겠다. 내 이름은 제로(zero)다. 진짜 이름인지는 너무 오래되서 확실하지 않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나오는 사립탐정 필립 말로를 기막히게 소화했던 캐릭터 정령이 날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 후에 다른 캐릭터 정령들도 날 ‘제로’라고 불렀다. 그러니 내가 제로구나, 하고 여길 뿐이다.
자, 그럼 활자들의 빗장을 슬그머니 열어볼까. 페이지들을 뛰어넘는다. 화면을 뚫고 손을 뻗는다. 영화 <링>의 사다코를 떠올려도 좋다. 깊은 우물 벽을 기어올라 밖으로 나온 사다코가 TV 브라운관을 뚫고 축축하게 젖은 시커먼 머리채와 힘을 잔뜩 준 구부러진 긴 손가락을 현실의 방 안으로 들이밀며 기어 나오는 바로 그 장면. 공포스러운 장면으로 당신은 기억한다. 사다코가 당신의 방 안으로 침입한 듯한 착각에 심장이 반응했으리라. 하지만 당신은 이내 이성의 꼬임에 기대어 안도했다. 모두 허구라고, 영화 속 상황일 뿐이라고 자위했다..
자위? 좋다. 하지만, 언제까지 자위할 수 있을까. 의심하라. 이미 당신의 가슴 한구석에 의심의 기운이 싹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소리도 낯설지 않겠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오래고, 학문 간의 벽도 낮아지고, 문화 간 장르의 벽도 허물어지고 있는 세상이고 보면 처음부터 경계란 없었으며, 경계란 매사 선을 그어놓고 범주의 논리와 원칙을 부여해 스스로 착각을 조장해온 인간만의 발명품인지도 모른다고, 당신은 생각하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CG로만 표현됐던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저녁 아홉 시 뉴스에 보도됐을 때, 당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떠올려 보라. 초대형 쓰나미가 일본 북동부 해안을 뒤덮는 장면, 여객기가 미국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들이박는 장면 앞에서 당신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실일 리 없어. 저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혹시 컴퓨터그래픽으로 구현한 게 아닐까?’
실재에 속하지 않는, 경계 밖 허구의 인물로 취급되어 온 나. 그런 내가 이제 그 경계를 무시하고 넘나든다 해도 그게 혁명이거나 하다못해 어떤 사건이 될 수는 없겠다. 이왕 경계가 모호해진 마당이지 않은가. 당신은 부정한다. 고집스럽다. 하긴 소설 속 활자 사이로 당신의 눈을 응시해온 나 같은 존재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가 이렇게 내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도, 피어오르는 의심 한 가닥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당신은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말할 것이다.
괴담과 진실의 경계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 제로가 등장했던 소설들과 현실 속으로 괴담이 퍼뜨리는 공포를 한 발 한 발 따라가보도록 한다. 새벽빛이 아스팔트와 건물 벽과 거리의 가로수에서 스며 나오기 전에.
쉿! 나는 화면에서 빠져나와 지금 당신 옆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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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