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크눌프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2.9.9
옷장에 90년대 옷이 아직 남아 있는데 닳지도 않고 메이커도 좋은 옷이라서 버리기도 아까워 오랜만에 꺼내 입어보면 같은 100 사이즈라고 해도 그때 100은 좀 넉넉한 느낌이랄까요, 품이 넉넉하다고 할까요, 살짝 크단 느낌을 받게 되더라구요. 요즘은 살짝 타이트하게 입는 것이 유행인지 요즘 100 사이즈는 몸에 딱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다보니 90년대 풍성한 옷을 입고 밖에 나가기가 힘들더라구요.
그때만 해도 몸무게가 늘거나 발이 커질 것을 대비해 옷이건 신발이건 조금 큰 것을 입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제 경우는 그랬었거든요. 옷이 좀 커야 사람이 커보인다는 생각도 했었구요.
머리카락 정확히 가운데를 가르고 무스와 스프레이로 더듬이를 만든, 소위 장국영 머리 헤어스타일도 유행했었고 지존무상, 천장지구의 유덕화처럼 큼지막한 청자켓이나 가죽 잠바 같은 남성미를 자랑하는 옷차림도 유행을 했었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유행시킨 힙합 스타일의 풍성한 옷차림도 인기 있었답니다. 공일오비 뮤직비디오에 나오듯 손수건을 두건처럼 패션 좀 안다는 젊은이들에겐 인기있는 컨셉이었죠.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었던 것은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의 강민 스타일. 강민 역을 맡았던 안재욱은 드라마 속 강민의 인기에 힘입어 원조 한류스타가 되었답니다. 처음에 드라마가 시작할 때만 해도 <사랑을 그대 품 안에>의 신성(新星) 차인표가 메인이었는데 강민 캐릭터의 인기 때문에 비중이 바꼈다는 소문이 들 정도로 강민 인기가 대단했었지요. 콘서트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고백하는 장면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장면이에요. 그전에 안재욱이란 배우가 <짝>에서 수더분한 동생 역할을 맡고 했었던 것을 기억하는 저에게는 살짝 적응이 안되기도 했었죠. 이후 안재욱은 여장남자를 소재로 한 <찜>이란 영화의 주인공을 맡게 되었는데... 여장을 해놓으니 기가 막히게 이뻤긴 이뻤지만 <별은 내 가슴에>에서의 로맨틱한 왕자님(?)을 떠올리며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기겁을 했었답니다.
'보릿고개'라는 단어가 통용될 정도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6,70년대, 억눌렸던 80년대를 지나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이 절정에 치닫았던 90년대에는 옷들도 다양한 종류가 나왔었지요. 군부독재가 끝나고 본격적인 민주주의가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는 세상이 되었고 그 결과 제법 많은 유행도 생겨났습니다. 날라리들이나 하던 옷차림이요 양아치들이나 하는 옷꼬라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금기가 풀린 세상 속에서는 개성 있는 패션이 되어갔지요.
저는 크게 개성 있는 옷차림이나 튀는 장신구를 차려 입었던 것은 아니지만 위 사진 속 겹쳐입기는 해봤던 적이 있어요. 소위 '레이어드 룩'이라고 했었죠. 2학기가 개강했는데 날이 더운 거에요. 그래서 긴 옷, 짧은 옷 두 가지를 겹쳐 입고 낮시간에는 긴 옷을 벗어 책가방에 넣어두고 선선한 저녁시간이 되면 화장실에 들어가서 짧은 옷을 벗고 긴 옷을 밑에 깔고 그 위에 짧은 옷을 더해 입었더랬습니다. 이게 좀 심드렁해지면 짧은 옷을 밑에 두고 긴 옷을 위에 입을 수도 있었지요.
폴로티라면 저런 식으로 겹쳐 입기도 했었고 남방셔츠의 경우는 또 달랐는데 남방셔츠를 마치 쟈킷처럼 겹쳐 입은 뒤에 남방셔츠 아랫단을 묶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답니다. 요즘은 그런 식으로 입으면 촌스럽다거나 복고스럽다고 하겠지만 셔츠 아랫단을 묶는 것이, 당시로서는 첨단 패션이었어요. 웃옷을 어깨에 두른 뒤 그 늘어진 양팔을 가슴께에서 매듭으로 묶어주거나 허리춤에 묶어두기도 하는 것이 대학가 젊은 남녀들의 흔한 옷차림이기도 했었죠. 청잠바(!)에 청바지로 코디하여 아래위로 나름 깔맞춤(!)해서 입는 것도 당시는 첨단 패션이기도 했었구요. 청잠바가 민망하다구요? 영화 <비트>의 정우성이나 <천장지구>의 유덕화를 봤다면 그런 소리를 못할 거에요.
또 하나 잊지 못할 패션이 올백 머리인데,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 친구 납득이가 무스를 쫙쫙 뿌려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많이들 깔깔거렸죠. 하지만 그 시절 주윤발의 인기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뒤로 넘겨 만드는 올백 머리는, 주윤발을 섬기기 위한 일종의 성스러운 예베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당시 주윤발의 인기는 정말로 대단해서 얌전했던 저도 주윤발을 흉내내기 위해 올백 머리를 하고 아버지 긴 코트를 몰래 입고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BB탄 권총을 쏘아대곤 했었지요. 좀 더 노는 애들은 라이타 가스를 들이마시는 장면도 해봤다고 하고 말보로 담배도 따라서 피워봤다데 그건 제가 따라가지 못했었죠. 아버지 바바리코트를 꺼내입고 입으로는 '빰 빠바 빠바바 빰 빠바 빠바바' 하는 정전자(賭神) 테마 음악을 노래하며 주윤발의 슬로모션 스텝을 흉내내보기도 했었는데 나중에 어느 영화에서였나 주성치가 그 유명한 장면을 따라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90년대가 끝나고 2000년이었나 2001년이었나 홍콩 느와르의 유행도 지나간 옛 이야기가 되었을 무렵에 소개팅을 했던 적이 있어요. 세상이 바뀌어 남자의 로망이던 바바리코트가 치한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을 모르고 나름 정성껏 꾸며 입는다는 것이 긴 바바리코트를 입고 소개팅에 나갔었죠. 결과는 꽝. 저를 본 첫인상이 완전 변태 바바리맨(!)이었을 거에요. 무스로 머리를 올백으로 해서 밀키스라도 손에 쥐고 나갔으면 조금이나마 주윤발 느낌이 났었을까요?
무스로 바짝 넘긴 올백 헤어스타일에 긴 바바리코트, 눈에는 검은 선글라스에 입에는 성냥개비, 그도 아니면 일대일 가르마로 곱게 가른 뒤 스프레이로 빗어넘긴 앞머리에 청바지에 청잠바, 청잠바가 좀 덥다 싶으면 허리춤에 묶어두는 센스까지... 지금도 눈에 선한 90년대 패션이에요. 이제는 개그 프로그램에서의 우스꽝스런 복학생의 모습으로, 추억을 자극하는 영화 속 웃음을 자아내는 소품으로 등장하곤 하지만 당시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패션 감각 없단 소리를 듣곤 했답니다.
바바리코트에 있어 또 하나 극적으로 패션 코드가 바뀐 것이 바로 수영복이에요. 예전에는 해수욕장이나 수영장에서 남자들은 반바지에 가까운, 아니면 그보다 더 큼지막한 수영복을 입곤 했었는데 요즘은 동네 수영장에서도 죄다 쫙 달라붙어 사타구니의 신체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삼각 수영복을 입고 있더라구요. 오랜만에 수영장에 가면서 90년대에 입었던 큼지막한 수영복을 가지고 갔는데, 죄다 삼각 수영복을 입고 있어서 눈이 둥그레졌던 경험이 있답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왜 이리 민망한 수영복을 입고 있는지, 죄다 수영 전문 선수도 아닌데!'
남들 다 몸에 쫙 달라붙는 삼각 수영복을 입고 있는데 혼자 크고 긴 수영복을 혼자 입고 있다보니 점점 민망해지더라구요. 그것만 해도 챙피한데 오래된 수영복, 그 허리춤의 고무줄이 삭아서 느슨해지는 통에 바지가 내려가지 않도록 허리춤을 손에 쥐고 탈의실로 나가야만 했더랍니다. 아듀 90년대 수영복, 굿바이 90년대 패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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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