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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10
영화광 김지운, 광해를 보고 고 노무현을 떠올리며 박수치는 관객들
현실은 영화에, 영화는 현실에 반영된다.
박정희, 김재규, 오다 노부나가와 아케치 미쓰히데
코드는 반복된다. 역사 역시도 물리학처럼 작용과 반작용, 관성과 가속도가 적용
영화에 반영되는,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코드들.
선우는 유리창을 바라본다. 유리는 선우의 모습을 반영한다.
사실,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의 얼굴을 직접 바라볼 수 없다. 오직 '비침'을 통해, 투영에 의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투영된 상(像)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거울 앞에서, 유리 앞에서 그는 옷깃을 바로잡고 넥타이를 고쳐매고 커피를 마시고 섀도 복싱을 한다. 그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상(像)을 보고 그는 흐뭇해한다. 그 상(像)은 그 자신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 욕망은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혼자만의 것이었다. 남자는 유리창에 비춰진 스스로의 욕망을 보며 달콤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 뿐이다.
영화가 현실을 움직이는지 현실이 영화를 움직이는지 더 이상 묻지 말자.
움직이는 것은 관객의 마음일 뿐이다.
보스의 거대한 뒷모습. 회장은 선우에게 여자 문제를 맡긴다.
"사장님께서 이걸 직접 갖다 드리랩니다."
"진짜 유치하게 생겼다. 아저씨답다. 귀엽네요"
보스의, 욕망의 대상에 불과한줄 알았던 여자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한다, 거리낌 없이 그리고 두려움 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여자에게 선우는 흔들리고 만다. 여자의 젊은 애인을 때려눕힌 선우는 도로에서 시비를 걸던 젊은 양아치들까지 때려눕힌다. 젊음으로 대표되는 욕망의 질주, 그 질주를 질투하기 시작하는 선우였다. 선우가 빠져든 것은 보스의 젊은 여자가 아니었다. 선우가 빠져든 것은 바로 그 '젊음'이었다.
여자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선우는 여자를 따라나선다. 보스의 바람과 달리 여자는 거침없이 자유롭게 행동한다. 감시를 받는, 보스의 욕망에 갇힌 여자이지만 그런 여자를 감시하면 할수록 갇혀져 있는 것은 선우 자신이 아닌가 싶다. 철망 너머 자유롭게 춤추는 여자와 철망 안에서 물끄러미 밖을 바라보는 선우. 동물원 우리 너머 자유로운 사람을 보는듯 선우의 욕망은 구속되어 있다.
잘/못/했/음/ 이 네 마디만 하면 된다는 살인청부업자의 말에 선우는 쉽게 흥분해버린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선우는 여자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받지 않는 전화. 선우는 초조해한다.
보스의 욕망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명령에 따르던 선우는 홀린듯 보스의 명령을 어긴다. 선우로서는 처음 어긴 보스의 명령이었다. 보스는 여인의 태도에서 선우의 명령 불복종을 알아채고 만다. 절대자이자 독재자였던 보스는 화를 낸다.
"나이가 들면 점점 인내심이 부족해져."
보스는 여인의 머릿결을 쓰다듬고 여인은 보스의 손길을 거부한다. 보스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여인의 마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각, 선우에게 흉기를 든 괴한들이 다가간다.
보스의 하수인이자 선우의 라이벌인 문석(김뢰하)은 선우와 달리,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거침이 없다. 밑바닥에서 올라온 하시바(풍신수길)처럼 예의범절이라곤 찾아보긴 어렵고 탱크로 부산 마산 시민을 밀어버리겠다던 차지철처럼 무모하기 짝이 없지만 그는 선우와 달리 보스의, 욕망의 도구로 남는다. 문석은, 보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제까지 그의 동료였던 선우를 린치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보스가 시키는대로 할 것. 보스의 명령 앞에서 망설이지말 것. 이것이 그들 세계의 철칙이다. 선우는 그 철칙을 어겼고 금계를 깬 선우는 오야붕을 정점으로 한 그 권력의 피라미드에서 축출된다.
"어이 김실장, 천하의 김실장이 이게 무슨 꼴이야?"
고문에 가까운 린치들, 생사를 오가는 고통이 이어진다. 그리고 선우는 보스를 만난다.
보스는 말없이 사라진다. 보스의 새로운 오른팔 문석은 보스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선우의 귀에 갖다댄다. 보스는 싸늘한 목소리로 선우에게 묻는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봐! 너, 그애 때문이냐? 말 못하겠냐?"
선우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그애 때문도 여자 때문도 아니다. 그저 선우의 마음이 움직였을 뿐. 문석 일행은 선우를 질퍽질퍽한 땅바닥에 파묻는다. 선우가 죽을 힘을 다해 흙을 파헤치고 가쁜 숨을 내쉴 때 지켜보던 문석이 조용히 박수를 친다.
"어, 구덩이를 너무 얕게 팠나. 아무튼 축하한다. 다시 살아나서."
문석은 일전에 선우가 손목을 날렸던 인물을 언급한다. 박정희 정권으로 따지면 김형욱에 가까운 인물이었을까. 김재규가 김형욱을 제거하듯, 그때 선우는 그 인물의 손목을 날리며 이렇게 말했단다.
"돌이킬 수 없다.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선우에게 온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끝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는 선우는 그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받아들이기엔 그 운명을 너무 가혹한 것이다. 다시 살아난 선우는 핸드폰 배터리와 불붙은 각목을 들고 문석 일행에게 거세게 저항한다.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 법이죠."
솟아오른 못의 운명은 가혹한 것이다. 보스는 지난 날의 일화를 얘기한다.
"몇 년 전 제법 똑똑한 친구 하나가 제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친구에게 심부름을 하나 시켰는데 사소하게 생각했었든지 실수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대단한 실수도 아니었습니다. 가볍게 야단치고 끝날 일이었죠. 그런데 그 친구 분위기가 이상한 거에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거에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닐 수도 있어요. 내 착오일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조직이란 게 뭡니까? 가족이란 게 뭡니까. 오야가 누군가에게 실수했다고 하면 실수한 일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은 나와야 되는 거죠.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그 친구 손목 하나가 날라갔어요. 잘 나가던 친구 인생이 하루 아침에 끝장이 났습니다. 이번 일은 손목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솟아오른 못은 보스를 찾고, 또 한 명의 손목 어쩌면 손목 그 이상을 내리치려는 망치는 선우를 찾는다. 보스의 명령 아래에서 욕망을 거세당했던 선우와 조직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욕망을 거세하고 있길 바랬던 보스는 끝을 알 수 없는 평행선을 내달린다.
선우, 그리고 아케치 미쓰히데이자 김재규인 그 남자는 보스를 찾아간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로봇 리플리컨트가 자신을 만든 박사를 찾아가듯 선우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했던 보스를 찾아간다. 김재규에게 박선호가 있었다면 선우에겐 민기가 있었다. 민기의 도움을 받은 선우는 러시아 갱단과 연결된 총기밀매단에게서 총을 구입한 뒤 보스의 밀실을 습격한다. 혼노지 또는 궁정동 안가에 해당되는 그 곳에서 보스는 높은 분들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무장한 선우가 그곳에 들어온다. 총구는 불을 뿜고 하나둘 차례로 쓰러진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보스를 쏘기 직전 선우가 본 것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총을 쏘는 순간 선우는 보스의 눈을 보지 않았다. 그가 그 순간 눈을 마주친 것은, 유리창 속 자신의 눈이었다.
야수의 심정으로 보스의 심장을 쏘았다? 강호의 도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쏜 것은 자신의 욕망을 강제하고 지배했던 그 금기였다. 창문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그 순간 자유로왔다.
보스를 쏘고 조직을 차지한다, 조직을 물리치고 유유히 사라진다, 보스의 숨겨진 돈을 들고 달아난다... 선우에겐 그 어떤 계획도 없었다. 중앙정보부 대신 육본으로 향한 김재규도 이렇게 막막했을까.
보스의 새로운 오른팔이자 단순무식한 문식(김뢰하)를 먼저 쏜 선우는 보스에게 다가갔었다. 보스는 그에게 왜 흔들렸냐고 물었었다. 그애 때문이었냐고 따지듯 물었었다. 허물어지듯 주저앉은 선우의 머리 위로 나뭇잎이 떨어진다.
피투성이가 된 선우는 말없이 허공을 바라본다. 공중에 장식된 나뭇가지에서 나뭇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진다. 선우가 처음 여자의 집을 찾아가던 날, 그 집 앞에 차를 주차시킬 때도 하늘에선 나뭇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졌었다. 그때도 바람은 불었었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려 나뭇잎이 떨어졌다. 아니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었다. 굳어가는 손으로 선우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선우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어쩌면 젊은 여자의, 몸에 배인 습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비 뻘이나 되는 돈 많은 늙은 남자와 붙어 먹고 그리고 또 몸 좋은 젊은 남자와도 붙어 먹는, 몸도 헤프고 정도 헤프고 웃음도 헤픈 쌍년, 갈보, 걸레. 어떻게든 비난을 하여도 좋다. 그렇게 헤프게 웃어주는 의미없는 한 번의 웃음에 남자는 사로잡혔다. 냉정하기만 했던 남자의 철저히 통제된 욕망은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 남자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고 말았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좋았다.
죽어가는 순간 남자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전화를 받았지만 남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남자가 손에 든 핸드폰 액정에 피가 튀었다. 남자는 가쁜 숨만 내쉬었다. 남자가 대답할 수 있었다면 그때 뭐라고 대답했을까? 둘이 도망가자고? 이젠 안심해라고? 사랑한다고? 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냐고?
사형집행인과 같은 또 한 명의 남자가, 죽어가는 남자의 몸에 몇 발의 총알을 더 박아 넣었다.
보스를 만나기 전, 남자는 백사장을 찾아갔었다. 백사장은 그의 아랫배에 단검을 여러 차례 꽂으며 인생은 고통이라고 하였다.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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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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