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크눌프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4.11.25
히틀러의 나치가 기세를 올리던 그때 그 시절, 싸이코패스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또라이가 관리하고 있는 수용소가 있었다. 부헨발트 수용소장이며 나치 친위대 대령인 카를 오토 코흐의 아내인 일사 코흐가 바로 그 또라이인데, 또라이란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자신이 관리하는 수용소에서 정말 미친 짓을 많이 했었더랬다. 수용소에 감금된 인원을 고문하는 것은 물론 각종 인체실험의 대상으로 삼더니 아예 시체를 해부하여 그 두개골과 가죽 등을 이용해 장식품을 만들기까지 한다. 남편이었던 카를 오토 코흐가 부정 횡령 등의 이유로 체포되어 수용소 현장에서 물러났으나 수용소를 지배하는 일사 코흐의 권력은 그대로였다.
부헨발트의 마녀 (Hexe von Buchenwald)라고 불리는 일사 코흐는, 발테마르 호벤이라는 의사로부터 외과적 기술까지 체득, 그 기술을 고문에 이용한다. 아니 그녀가 그곳에서 저지른 행동들은 고문이 아니라 살육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것이리라. 가학적이면서 또한 색정광이기도 했던 일사 코흐는 종전 후 전범재판에서 다년 간의 감금형을 받게 된다. 색정광이라는 설명에 걸맞게 감옥의 교도관과도 육체적 관계를 맺은 그녀는 교도관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된다. 이후 몇 번의 재판 끝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녀는 61세의 나이에 감옥 창살에 목을 매고 자살했고 이때가 1969년이었다.
실존인물인 일사 코흐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 1969년, 그리고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난 1974년에 일사 코흐의 악행을 소재로 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돈 에드먼즈 감독이 연출한 나치 익스플로테이션 무비 (Nazi Exploitation Movie) 일사-나치 친위대의 색녀 (Ilsa, She Wolf Of The SS)가 바로 그것으로 단순히 글래머라고 부르기 섭섭할 정도의 엄청난 거구(?)를 지닌 여배우 다이앤 쏜 (Dyanne Thorne)이 일사 코흐 역할을 맡았었다. 1943년 미국에서 태어난 다이앤 쏜은 성인잡지 속 핀업 누드모델, 라스베가스 쇼걸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배우의 길에 들어섰단다. 글래머러스한 육체와 강인하게 보이는 얼굴이 합쳐진 독특한 이미지 때문이었는지 일사 코흐 역에 캐스팅되었고 이후 다이앤 쏜은 나치와 SM, 하드고어와 포르노에 가까운 에로티시즘이 합쳐진 일사 시리즈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수용소 속에서의 변태적 성행위, 그리고 가학과 피학을 오가는 권력의 세계를 다룬 일사 시리즈는 70년대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익스플로테이션 무비에 영향을 줬으며 영화의 주인공 일사 역을 맡은 여배우 다이앤 쏜은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로부터 컬트적인 인기를 모았었다. 실존인물 일사 코흐의 잔인함, 익스플로테이션 무비가 그려내는 변태적이면서도 참혹한 영상 속에서도 여배우 다이앤 쏜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일사 시리즈 등을 같이 만들었던 동료 배우 하워드 마우어 (Howard Maurer)와 결혼해서 오랫동안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뤄나갔다. 공부에도 매진하여 비교종교학 박사 학위까지 땄다나 뭐라나.
우리네 똘이장군이 간첩도 잡았다가 귀신도 잡았다가 암행어사가 되어 탐관오리를 잡기도 하듯 다이앤 쏜이 연기하는 일사 캐릭터 역시 나치의 수용소에서 시작해서 여러 곳으로 그 영화적 무대를 옮긴다. 일사- 나치 친위대의 색녀를 만든 돈 에드먼즈 감독은 중동으로 배경을 옮겨 일사 2 - 오일 시크의 하렘 키퍼 (Ilsa, Harem Keeper Of The Oil Sheiks)란 영화를 만들었다. 나치의 수용소와 중동의 하렘을 배경으로 삼았던 일사 시리즈는 미소냉전이 한창이었던 시대적 분위기에 맞춰서 소련의 굴락 수용소를 배경으로 또 한 편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일사 4 - 시베리아의 14 수용소 (Ilsa, The Tigress of Siberia)였더랬다.
흔히들 일사 4 - 시베리아의 14 수용소 또는 시베리아의 암호랑이로 불리는 영화 앞에 일사 3 - 악질간수 (Ilsa, The Wicked Warden) 편이 있다고 하는데 헤수스 프랑코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일사 악질간수 (Ilsa, The Wicked Warden)편은 엄밀하 따지면 정식 일사 시리즈에 포함되진 않는다고 한다. 원래는 Greta: Haus Ohne Manner 또는 Greta, the Mad Butcher, Greta the Torturer 등으로 불렸다고 하며 일사 시리즈의 주인공인 다이앤 쏜이 역시나 이 영화에 가학적인 색정광 캐릭터의 수용소 관리자로 출연하는데다가 다이앤 쏜이 그동안 연기했던 일사 캐릭터가 워낙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보니 정식 일사 시리즈가 아니면서도 일사 시리즈로 분류되는 묘한 영화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더랬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쯤 전, 이런 류의 영화에 조예가 깊은 친구(?)를 만나 일사 시리즈를 쭉 감상하게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식 일사 시리즈가 아닌, 바로 요 악질간수 (Ilsa, The Wicked Warden) 편이었더랬다.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I spit on your grave)의 한 장면이 생각날 정도로 처참한 몰골의 여인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중남미 어디의 가상국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그곳 어딘가의 비밀스런 정신병원에서 간신히 탈출한 여인이 천신만고 끝에 도움을 청하려고 민가를 찾아갔으나 마치 우리네 염전노예가 잡혀가듯 뒤쫒아온 병원 관리자들에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녀의 이름은 로자(Rosa)였고 로자의 언니 애비(Abby, Tania Busselier)는 사라진 동생을 보았다는 소식을 듣자 그 자신이 직접 병원에 잠입하여 동생을 찾아보고자 한다. 성적 문제를 저지른 것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그곳 병원의 수용소에 자진 입소한 애비. 아니나다를까 병원 환자복으로 갈아입는 장면에서부터 가학적인 행동들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이름 대신 옷에 붙은 번호(41번)로만 불리게 될 것이고 번호로만 답할 것을 명령하는 수용소 관리인들. 환자복을 갈아입고 그곳에서 지내게 된 애비는 수용소 내의 지독한 현실을 이내 깨닫게 된다. 고문과 폭력으로 얼룩진 이곳은 환자라는 이름으로 수용된 죄수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간수들로 이뤄져 있었는데 이러한 이분법적인 계급 구분을 좀 더 파고들고 가면 환자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용소장 일사(그레타, Dyanne Thorne)의 성노리개였던 후아나 (Lina Romay)는 신입 죄수인 애비 (Tania Busselier)를 마음에 들어한다. 후아나는 애비에게 굴욕적인 동성애 행위를 강요하지만 애비는 이를 거부하고 갈등이 생긴 두 사람은 샤워실에서 한바탕 몸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이 싸움으로 인해 애비는 수용소장 일사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된다.
성적인 문제가 있어서 이 병원에 감금되었다는 이들, 하지만 이들의 성적 문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적 메타포가 된다. 영화의 오프닝, 탈출에 실패한 여인의 Rosa라는 이름이 미완의 혁명가였던 Rosa Luxemburg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고나 할까. 감금과 억압, SM과 고문으로 이어지는 정신병원, 아니 이 수용소는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까지 연상하게 만든다. 한편, 수용소장 일사의 성적 노리개였던 후아나 (리나 로메이)는 신입 죄수 애비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침대 위 일사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애비에게 관대하게 대해줄 것을 부탁하나, 잔혹한 일사는 부탁을 하는 후아나의 뽀얀 몸뚱이에 끔찍한 가학행위를 한다. 후아나의 부탁을 들어줄 것처럼 했던 수용소장 일사는 오히려 애비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한다. 성고문과 전기고문이 합쳐진 형벌 속에 끔찍한 고통을 겪던 애비는 폐인이 되어버린다. 그의 동생 로자처럼.
권력자의 성적 노리개이면서 또한 같은 죄수들 위에 군림하던 후아나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가 이 영화에선 무척이나 중요한데 후아나는 애비의 비극 이후 돌변하여 반-일사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혁명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죄수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수용소는 발칵 뒤집어진다. 애비의 잠입으로 인해 수용소 외부의 인력이 수용소를 찾게 되고 그 결과 병원으로 포장하고 있던 수용소 내의 잔인한 행동들은 백일하게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힘입은 죄수들은 수용소장 일사의 방으로 찾아간다. 헤수스 프랑코 감독은 영화의 라스트 씬에서 잔인한 독재자 일사 (다이앤 쏜)의 몸뚱이를 향해 달랴드는 죄수들(민중)의 모습과 먹이를 물어뜯는 짐승들의 모습을 교차하며 영화적인 상상력을 더해준다. 아마도 악질간수 일사의 몸뚱아리가 분노한 죄수들에 의해 그 살점이 한 점 한 점 물어뜯겨졌노라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악질간수 일사 캐릭터를 연기한 다이앤 쏜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영화 출연작을 남겼지만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에 낀 후아나 역을 연기한 리나 로메이는 다이앤 쏜보다 훨씬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그 대부분은 익스플로테이션 무비로 불리는 B급 또는 C급 영화였고 여기에 더해 실제 성행위와 동성애 성교가 더해지는 X등급 영화 및 에로티시즘이 가미된 공포영화, 코미디영화까지 다양하게 출연했다고 한다.
여배우 리나 로메이는, 일사 악질간수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 등을 맡은 헤수스 프랑코 감독과 1971년 영화적인 동료로 만나 2008년 부부의 인연을 맺고 같이 살았다고 한다. 리나 로메이는 그동안 백 편 이상의 영화를 촬영했는데 그 대부분이 훗날 남편이 되는 헤수스 프랑코 감독의 영화였다고. 영화 속 리나 로메이의 연기가 종종 포르노의 그것에 가까운 것이기도 했음을 생각한다면 감독과 여배우로 만나 결혼까지 함께 했던 두 사람은 참 특이한 인연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에 헤수스 프랑코 감독과 결혼한 리나 로메이는 2012년에 암으로 사망, 배우자인 헤수스 프랑코 감독은 일 년 후인 2013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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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