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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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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15.4.4
요즘 관객들, 아니 방화란 이름을 걷어내고 상업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던 90년대 후반의 한국영화를 보고 자란 영화팬들에게 막둥이 내지 막동이라고 하면 영화 초록물고기에서 한석규가 맡았던 배역 이름이나 그 이름에서 따온 시나리오 공모전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둥이 내지 막동이 하면 떠오르는 배우는 초록물고기 속 한석규가 원조는 아니었다. 개그맨이란 국적불명의 단어가 우리네 방송계에 널리 퍼지기 훨씬 전, 코미디언 내지 희극배우로 불리던 이들 중에 정극과 희극을 오가며 종횡무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누볐던 이들이 있었다. 젊은 세대에서는 야인시대 등등에서 정치권 인사에게 폭행 당하는 인물로 이름이 익숙?한 김희갑을 필두로 양훈, 구봉서, 서영춘, 곽규석,그 송해 등등이 그들이었으며 그들 희극배우들을 앞세운 영화 오부자(1958)는 당시 영화팬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었다고 한다. 오부자, 즉 1명의 아버지와 4명의 아들을 의미하는 제목의 이 영화에서 구봉서는 막내 캐릭터를 맡았다. 극중에서 그는 막둥이로 불렸고 그것은 그대로 구봉서의 별명이 되었다.
성룡과 주윤발, 장국영과 왕조현, 유덕화와 이연걸이 인기를 모았던 8,90년대 홍콩영화판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수많은 영화가 해마다 쏟아졌던 그때 그 한국영화판에서 이들 희극배우들은 스크린에서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일군(一群)의 희극배우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막둥이 구봉서였다. 구봉서는 희극영화에만 머물지 않고 정극영화에도 출연,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씬스틸러가 어떤 것인지를 톡톡히 보여준다. 그가 보여준 희극연기는 전쟁의 비극성과 대조되면서 묘한 페이소스를 남겼다. 죽어가는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장황스럽다 못해 당황스러울 정도로의 긴 유언을 남기는 구봉서의 모습은, 리얼한 전투 묘사에 치중한 이 영화에서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장면이었으나 "내가 재미있게 말하면 너희들은 다 웃었지. 내가 죽으면 누가 너희들을 웃겨주니..." 라는 대사만큼은 구봉서, 아니 이 땅의 희극배우들의 삶을 대변해주는 명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코미디언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하니 심형래, 김형곤, 김정식 등이 출연했던 에스퍼맨이니 비룡동자니 슈퍼홍길동이니 어쩌니 하는 아동용 영화를 생각하기 쉽겠지만 구봉서씨가 영화적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엔 그 위상이 지금과 달랐다. 1958년 개봉작 오부자로 시작된 막둥이 구봉서의 스크린 질주는 오부자의 속편 격인 형제 시리즈는 물론이요 구봉서 본인의 이름 내지 별명을 앞세운 구봉서의 벼락부자, 사직골 구서방, 막동이 신혼 십개월, 구봉서의 구혼작전 등등으로 이어졌다. 1970년에는 당나귀 무법자란 영화에 출연, 위스키 대신 막걸리를 마시고 시가 대신 곰방대를 입에 물며 짐짓 서부의 카우보이 흉내를 내어보기도 했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다찌마와 리 스타일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엉성하면서도 기발하게 영화가 진행되더니 영화가 끝날 무렵에 쓰러진 주인공 구봉서가 벌떡 일어나서 "안녕하십니까. 구봉서입니다. 제가 제 소원이던 서부영화에 이렇게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재미나게 보셨습니까? 감사합니다."라고 능청스럽게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속 해병대 대원 , 당나귀 무법자 속 카우보이 등 남성적인 캐릭터 연기에도 일가견이 있는 구봉서였지만 희극배우로서 그의 매력은 남성적이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 더 돋보였다. 1960년대란 시대적 배경에서는 남자의 직업으로 도통 여겨지지 않았던 직업군을 남자인 구봉서가 연기하며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떨면 관객들은 연신 포복절도하곤 했으니 그렇게 나온 영화들이 남자는 안 팔려, 남자 식모, 남자 미용사, 남자 기생 같은 작품이었다. 옛날 영화라서 감상하기도 어렵고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없지만 우연한 기회에 감상한 남자 미용사는 당시 배우로서 구봉서의 인기가 어땠을지 그가 출연한 영화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에 충분한 영화였달까.
요즘이야 남자 미용사가 전국적인 규모의 미장원 체인까지 내는 시대지만 1960년대 그 시절엔 남자 미용사란 무척이나 희귀한 존재였던 것으로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백수 청년 구봉서는 우연한 기회에 남자 미용사 행세를 하게 된다. 남자 미용사 쓸 생각 없냐며 동네 미용실을 연신 돌아다녀보지만 들어간 미용실에서마다 미친 놈 취급받던 그때, 마침 서울 번화가의 고급 미장원에서 앙드레란 이름의 프랑스 유학파 남자 미용사를 영입하려고 했단다. 미장원 원장 최지희는 프랑스 유학파 미용사 앙드레가 오후 2시에 미장원으로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지 앙드레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미용기술을 갖고 있는지 도통 모르는 상태였더랬다. 그러던 차에 곳곳의 미장원을 돌아다니며 남자 미용사 써볼 생각이 없냐고 묻던 구봉서가 문제의 그 미장원에 도착한다. 남자 미용사... 라는 말이 채 떨어지기 무섭게 미장원 원장은 구봉서를 유학파 미용사 앙드레로 착각하고 대뜸 계약서를 내민다. 영문을 모르는 구봉서는 덥썩 해당 미장원 전속 계약서에 싸인을 했고 그 미장원의 대표 미용사가 된다. 거기까지의 영화 진행은 마치 고골리의 감찰관 속 상황과 비슷하달까.
구봉서와의 계약을 마치고 미장원 원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진짜 앙드레가 뒤늦게 미장원을 찾아온다. 수 백 년 전 유럽 귀족들이 사용했음직한 금발 가발에 지팡이까지 흔들며 미장원을 찾아와 혀꼬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진짜 앙드레를 인근 다방으로 데리고 간 가짜 앙드레 구봉서는 진짜 앙드레와의 대화를 통해 간단한 프랑스어 회화와 프랑스 유학 경력에 대해 알게 된다. 1960년대에는 요즘의 압구정동이나 분당 같은 지역이 지금과 같은 번화로운 곳이 아니었으니 명동 쯤이나 될까 싶은 그곳에서 가짜 앙드레 구봉서는 능청스런 언변으로 진짜 앙드레를 밀어내고 프랑스 유학파 앙드레 행세를 한다. 진짜 앙드레의 외양을 흉내내서 금발 가발에 지팡이까지 장만한 구봉서는 앙드레 행세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유학파 미용사의 등장에 그곳 미용실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음을 물론이요, 앙드레의 손길을 기다리는 귀부인들의 행렬이 길어진다. 재능 있는 리플리 아니 재능 있는 구봉서라고나 할까.
미용실 가위라고는 제대로 잡아보지 않았던 구봉서가 프랑스 유학파 미용사 행세를 그럴듯하게 해내긴 어렵겠지만 프랑스 유학파란 이름에 들떠 구봉서의 서툰 미용 솜씨를 천재적인 것인양 착각하는 손님들의 허영심 덕분에 구봉서의 앙드레 행세는 제법 그럴 듯해져갔다. 떨리는 손으로 서툴게 잘라도 프랑스 최신 커트요, 날계란을 얼굴에 발라도 유럽 최신 유행 마사지가 되어버리는 해프닝 속에 앙드레의 명성은 드높아져만 갔다. 급기야 구봉서는 음악을 들으며 감성을 고조시켜 머리를 만져준다며 여인네들의 머리를 꽃꽂이 형태로 만들어버린다. 구봉서가 해준 기기묘묘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서 서울 대로(大路)를 걸어다니는 미용실 손님들의 도도하면서도 우스꽝스런 모습은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성애(性愛) 장면이며 노출 장면에 거리낌이 없는 요즘 영화감독들 같으면 주인공 앙드레 역을 맡은 구봉서와 미용실 원장 최지희, 앙드레와 연인 관계가 되는 남정임의 삼각관계를 노골적인 치정관계로 화끈하게 묘사를 했겠지만 60년대 그것도 구봉서 주연의 코미디 영화라서 그런 노출이 전혀 없다. 그 시절 트로이카 여배우 중의 한 명이었던 남정임은 이 영화에서 고아 출신의 식모 신분이지만 세탁소 옷을 빌려입고 주인집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귀공녀 행세를 하는 아가씨로 등장, 백수 신분이지만 프랑스 유학파 미용사 앙드레 행세를 하는 구봉서와 맺어진다. 그리고 그런 남정임의 곁에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아가씨 남정임에게 손님이 맡긴 고급 옷을 빌려주는 세탁소 직원 서영춘이 있었다.
세탁소 직원 서영춘은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 남정임에게 손님의 옷을 빌려주며 호의를 베풀지만 그 옷이 다른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임을 알게되자 흥분하여 남정임을 찾아간다. 자신이 빌려준 옷을 입고 구봉서와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본 서영춘은 대뜸 (자신이 빌려준) 옷을 벗으라며 호통을 친다. 다짜고짜 옷 벗어! 옷 벗으란 말야!를 외치는 서영춘, 그리고 그런 서영춘을 말리는 구봉서와 남정임 앞에 경찰관이 등장한다. 관객 입장에선 프랑스 유학파 앙드레 행세를 하는 구봉서나 부잣집 귀공녀 행세를 하는 남정임이 별종인 인물이지만 영화 속 경찰 입장에선 멀쩡한 아가씨에게 대낮에 그것도 대로(大路)에서 옷을 벗으라고 연신 고함을 지르는 서영춘이야말로 이상한 인물일 테니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코믹요소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서울의 헤어스타일 트렌드를 경천동지할 전위적 모양새로 바꿔놓은 가짜 앙드레의 행각은 진짜 앙드레가 미장원을 찾아오면서 끝나게 된다. 진짜 앙드레를 흉내낸 가짜 앙드레 구봉서와 그런 가짜 앙드레 구봉서를 흉내낸 서영춘, 여기에 미장원을 찾아온 진짜 앙드레가 마주치면서 미장원 안은 혼란스러워진다. 그 직후 미장원 원장과 진짜 앙드레 둘 다를 만나봤던 인물이 등장하며 진짜 앙드레가 확인되고 가짜 앙드레 구봉서는 미장원에서 쫒겨난다. 요즘 영화 아니 어쩌면 내 머리 속의 영화 스타일대로라면 그동안 가짜 앙드레가 미장원 원장은 물론이거니와 장안의 귀부인들을 미용을 빙자하여 육체적으로 희롱하고 그의 사기 행각이 드러났을 때 쯤에 소리소문 없이 살해되었더라... 식의 비극적인 결말을 택했을 법도 하다만, 구봉서 주연의 60년대 희극영화는 해피엔딩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밉지 않은 사기꾼 구봉서는 정중한 사과와 함께 미용실을 떠나고 미용실 원장 최지희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이제 와서 이 인간이 사기꾼이었다고 말해봤자 미용실 명성에 먹칠을 하는 꼴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원장 본인이 가짜 앙드레에게 사랑을 느껴서였을까, 별다른 사법조치 없이 아니 사법조치보다 더 무서웠을 수도 있을 린치 한 번 없이 구봉서는 돌아간다. 여기서 한 술 더 떠 원장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허영심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자아반성까지 한다. 가짜 앙드레임이 밝혀진 구봉서에게 호되게 뺨 한 대 때리고 "사랑했어요. 이별의 선물이에요."란 말을 남기고 사라진 남정임 역시도 구봉서를 미워하기보다는 자신의 허영심을 탓한다.
프랑스 유학파 미용사 앙드레와의 결혼을 꿈꿨던 남정임은 그녀 자신이 사랑했던 구봉서가 가짜 앙드레였음이 밝혀지자 자신에게 그토록 공을 들였던 세탁소 직원 서영춘과의 결혼을 홧김에 택하고 만다. 앓아 누워있는 식모 남정임에게 앙드레 가발을 벗어던진 구봉서가 사과의 말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고 그는 시골 고향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는 말과 함께 그녀의 결혼식 화장만큼은 직접 해주고 싶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운명의 결혼식 날, 고아 출신이면서 식모였던 남정임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신부대기실로 구봉서가 찾아왔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남정임을 뚫어지게 쳐다본 구봉서는 남정임의 머리를 곱게 매만져주고 뒤돌아 나간다. 윤종신의 초창기 히트곡 너의 결혼식 가사가 얼핏 생각나는 장면이랄까.
몰랐었어 니가 그렇게 예쁜지 웨딩 드레스
하얀 네 손엔 서글픈 부케 수줍은 듯한 네 미소
아름답지만 허영심이 있던 식모 아가씨 남정임이 세탁소 직원 서영춘과 결혼을 하는가 하는 그 순간, 신부 입장을 기다리는 결혼식장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신부 남정임이 사라진 것이다. 신부를 기다리던 살살이 서영춘은 결혼식장 바닥에 엎어져 울고만다. 그리고 하얀 웨딩드레스 차림의 남정임이 앞서 구봉서가 말했던 시골로 내려가 구봉서와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황톳길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개울을 지나며 돌다리를 건넌다. 먼저 건너던 구봉서가 물에 빠지지만 그 와중에도 서로를 끌어안으며 사랑을 재확인한다. 코믹하게 흘러가긴 하지만 얼핏 고골리의 감찰관과 알랭 들롱 주연의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 등을 연상케 하던 이 영화는 그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 졸업 속 결혼식 장면마저 연상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렇게 프랑스 유학파 미용사 앙드레 사칭 사건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살살이 서영춘씨가 연기한 세탁소 직원에게만큼은 새드엔딩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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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