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리뷰 코너

크눌프
- 작성일
- 2013.5.1
용문비갑
- 감독
- 서극
- 제작 / 장르
- 중국, 홍콩
- 개봉일
- 2012년 3월 15일
할리우드에서 SFX 기술을 배워온 서극은 홍콩 영화에 SFX 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시킨 감독입니다. 그의 이런 영화적인 야심은 홍콩 영화 발전에 있어서 좋은 영양분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SFX로서의 야심이 지나쳐서 영화 자체의 기본적인 스토리에 치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의 야심작 촉산과 신촉산 역시 이런 SFX적인 집착이 만든 영화였죠. 그의 영화적인 야심이 어디에 있든 서극이면 홍콩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독이고 제작자입니다.
하지만 문화가 다르고 영화 보는 관점이 다른 우리 나라 관객이라면 서극의 이런 SFX에 대한 생각과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중국식 허풍 섞인 과장된 무술보다는 발과 발, 손과 손이 마주치는 리얼한 무술 쪽을 더욱 선호하니까 말이죠. 홍콩 영화 시장에서 인기 꽤나 끌었다는 용문비갑 역시 이러한 한국과 중국(홍콩) 간의 영화를 대하는 문화적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등장인물들을 공중에 띄웁니다. 마치 만화영화의 한 장면처럼 창과 검이 날라다니며 부딪히죠.
사실 이 영화 용문비갑은 예전 90년대에 국내에서도 인기 있었던 홍콩 영화 신용문객잔의 속편 격에 해당하는 영화입니다. 명나라 시절 환관들의 득세 속에 국경 근처 용문의 객잔에 머문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신용문객잔은, 양가휘와 임청하, 장만옥이라는 호화 캐스팅에 사막과 객잔의 외룹고도 황홀한 풍경이 어우러져 독특한 미학적 완성도를 보였었답니다. 이혜민 감독이 연출했던 신용문객잔이 동창의 환관이 저지른 악행을 다루고 있다면 서극이 연출한 용문비갑에선 동창 뺨치는 서창의 환관이 악역으로 등장한답니다.
전편 신용문객잔을 보신 분들이라면 양가휘, 임청하, 장만옥, 그리고 악당으로 나온 견자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실 이들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에 등장한 주방장의 칼솜씨였겠죠. 아무튼 이혜민보다 더 이름값이 있는 홍콩 영화판의 거두 서극 어르신은 이연걸을 비롯한 중화권의 톱스타들을 모아 또 한 편의 SFX 무협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무려 전격 3D 영화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처음부터 날고 뛰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전편에서 양가휘가 맡은 캐릭터를 이연걸이 고스란히 물러받았고 견자단이 맡았던 무술 고수 환관 역은 진곤이란 젊은 배우가 담당했죠. 임청하가 맡은 캐릭터는 죽었으니 대신 맡을 이가 없다는 것은 전편 신용문객잔을 보신 분이라면 아는 내용일테고 장만옥이 담당했던 캐릭터는 주신(저우신)이 맡았습니다.
문제는 이연걸과 주신(저우신)의 나이 차이에요. 이제는 심하게 피곤해보일 정도로 나이가 든 이연걸은 팽행한 피부의 주신과 이룰 수 없는 연인 관계를 연기하기에는 부적격해보입니다. 눈 밑이 처진 모습이, 삼촌이나 시아버지 역할이 어울리겠다 싶을 정도랍니다. 오히려 주신의 상대역으로는 화피 등에서 호흡을 맞춰봤던 젊은 배우 진곤이 적당하다 싶지요. 그렇게 이연걸과 주신의 비주얼적인 연령 차이가 크다보니 스토리의 큰 축이 되는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 부분은 기대를 접어야될 판이랍니다. 난잡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과도한 CG 때문에 관객이 영화에 몰입을 하지 못하는 것도 부족해서 남녀 주인공의 상성에 부족함이 있으니 홍콩 무협 영화의 팬으로서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죠. 영화를 그나마 살려주는 것은 진곤의 1인 2역 연기입니다. 도둑패 청년 풍리도와 초고수 환관 우화전 역을 맡은 진곤은 서로 다른 캐릭터의 매력을 잘 살려 이 영화의 거의 유일한 볼거리가 되어줍니다.
남장여인 복장으로 영화의 전반에 거쳐 출연하는 주신은 예전에 장만옥이 맡았던 캐릭터를 이어받았는데 전편에서 안타깝게도 사랑을 못 차지했었죠. 이번 영화에선 남장을 한 채로 연인을 끊임없이 쫒아다닌답니다. 양가휘가 맡았던 주유안 캐릭터를 이어받은 이연걸은 그 사랑을 애써 피하려고 하는 캐릭터에요. 주유안은 환관의 전횡에 항거하며 서창과 환관의 악질 관리를 혼내줍니다. 주신이 맡은 능안추는 사랑하는 주유안의 이름을 빌려 그녀 역시 악질 관리를 처벌하죠. 주유안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에 도전하는 무리를 찾기 위해 서창의 고수이자 황궁의 권력자인 우화전(진곤)이 직접 나섭니다.
명나라 8대 황제 성화제 시절, 황제의 총애를 받던 만귀비는 자신만이 황제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아이를 가진 후궁을 죽여버리도록 명합니다. 그런 만귀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후궁이 아이를 밴 채로 달아났으니 그 아이가 나중에 제9대 황제가 되는 홍치제가 됩니다. 고생 끝에 자라나서 황제가 된 홍치제는 폭군과 암군이 많은 명나라 황제 중에서는 꽤나 괜찮은 황제였는데 명이 짧아서 삼십대에 죽고 말았죠. 이후 명나라는 혼돈의 시기를 겪다가 망하고 말았답니다. 동창이니 서창이니 하는 환관들의 정치기구 역시 성화제 시절에 득세를 했던 기관이었구요. 영화는 이러한 배경을 깔고 시작됩니다.
주유안과 주유안 행세를 하는 남장여인(주신)은 황제의 아이를 밴, 도망 후궁을 돕습니다. 문제는 이 도망 후궁이 환관 우화전의 계략이었던 것이죠. 우화전은 국경으로 달아나는 일행을 쫒아 용문에 도착합니다. 만귀비의 총애를 받는 서창의 우화전은 이번 기회에 기존에 득세하던 동창을 완전히 눌러버릴 절호의 기회로 삼을 생각으로 직접 출병하게 되었죠. 영화는 중화권을 대표하는 무술 고수 유가휘를 환관으로 출연시켜 이연걸과의 무술 대련을 선보입니다. 역시나 문제는 CG에요. 이연걸과 유가휘의 대결이라면 무술인 대 무술인으로서의 리얼한 대결이 가능할텐데 공중을 날고 바람을 가르느라 그들 몸에 오래도록 체득된 무술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합니다.
그래도 이연걸과 유가휘의 대결까지는 동방불패나 초류향 같은 홍콩 무협 영화에 익숙한 분이라면 그런대로 즐길만한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막 모래 폭풍 휘날리는 용문의 객잔으로 관객을 이끈 영화는 더욱 사정없이 특수효과에 매달립니다. 60년만에 한 번 사막의 모래 폭풍 때문에 오래된 옛 도시의 보물이 드러나게 된다는, 인디애나 존스나 용형호제 시리즈에서 봤음직한 설정을 가져온 이 영화는 명나라의 환관과 그가 이끄는 관리들, 환관의 전횡에 맞서 싸우는 영웅지사와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 보물을 노리는 도둑떼를 한 장소에 몰아넣죠. 그리고 그 장소에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사정없이 특수효과를 붓습니다.
도적떼의 일원인 풍리도와 그와 얼굴이 비슷한 환관 우화전을 연기한 진곤, 진곤이 맡은 풍리도는 우화전 행세를 하며 관리와 도적들 사이를 오가죠. 우화전은 자신의 행세를 하는 도적이 있다는 얘기에 흥분을 하게 되구요. 도적떼는 보물을, 영웅지사는 정의를, 악질 환관은 권력을 탐하는 사이에 거대한 사막의 모래 폭풍이 객잔을 삼킵니다. 그리고 그 모래 폭풍 때문에 오래된 유적이 나타나죠. 보물로 가득찬 유적 속에서 악연으로 맺어진 이들이 칼을 겨룹니다. 이런 류의 영화가 늘 그렇듯 악인은 마지막에 패하여 죽게 되고 정의는 승리하게 된답니다. 우화전이 격투 끝에 죽고난 뒤, 우화전을 빼닮은 풍리도는 우화전 대신 황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만귀비를 독살하고 황궁의 질서를 바로잡지요.
아마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용문의 결투)를 보신 분들이라면 과장된 액션 연기가 나오는 신용문객잔이 마뜩찮게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용문비갑은 그런 신용문객잔에 눈이 맞춰진 관객들에게, 마치 용문객잔 팬이 신용문객잔을 보고 혀를 차듯 실망감을 안겨주죠. 주방장이 등장하는 마지막 칼싸움 장면이 어떻든 간에 신용문객잔은 양가휘와 장만옥, 임청하의 삼각관계가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 용문비갑에서는 그러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이 없어요. 있는 것이라고는 진곤이 펼치는 1인2역 연기 정도인데 이것도 사실 극 중에서 크게 긴장을 주는 것은 아니랍니다. 진곤의 팬들이 환호할 정도 딱 그 정도에요. 지난 날 중화권 필름값 꽤나 올렸던 이연걸에게 주인공을 맡겼으나 부쩍 늙어버린 이연걸과 진곤, 주신, 계륜미 등의 젊은 배우들과는 상생이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양가휘와 장만옥, 임청하가 출연했던 전편이 더욱 그리워진다고나 할까요.
서극과 이연걸의 만남이라는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국내 극장가에서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막을 내리고 말았던 이 영화는 그래서인지 번역에도 성의가 없습니다. 굿다운로드를 통해 관람한 이 영화는 앞부분 자막에 명나라 영락제라고 시대를 설명합니다. 영락제가 아니라 성화제 시대를 다룬 영화이고 제 귀로 듣기에도 명조 성화로 들리네요. 명나라 영락제 주체는 우리로 치면 태종 이방원에 해당되는 인물로 장자 승계 원칙을 깨고 숙부의 자리에서 정난을 일으켜 옥좌를 차지한 인물이랍니다. 정화를 시켜 대원정을 떠나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황권이 강했던 영락제 시절과 동창과 서창으로 대표된느 환관들의 전횡으로 얼룩진 성화제 시절과는 차이가 크답니다. 한 번 영락제로 오역한 영화는 끝까지 영락제임을 고집합니다. 명 성화 23년, 악명 높았던 만귀비의 죽음으로 끝을 장식하는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명 영락제 23년이라고 다시 한 번 잘못 번역해놓고 있죠. 번역의 전문성이 절실히 느껴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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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