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리뷰 코너

크눌프
- 작성일
- 2013.6.8
신해혁명
- 감독
- 장리
- 제작 / 장르
- 중국
- 개봉일
- 2012년 3월 15일
꼬꼬마 시절에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민주, 민족, 민생 이렇게 앞글자기 민O로 시작되는 단어 세 개를 모아 내가 만든 삼민주의라면서 커서 크게 되면 써먹겠노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뒤늦게 읽은 쑨원 위인 전기에서 나보다 먼저 '삼민주의'를 내세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얼마나 탄식을 했었는지 남들은 모를 것이다. 쑨원 또는 손문으로 불리는 인물의 삼민주의는 민족, 민권, 민생 이렇게 삼민이고 국민학생이던 당시의 내가 만들었던 삼민사상은 당시 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민주, 남북한 통일을 염두에 둔 민족, 경제적으로 풍유로운 삶을 뜻하는 민생 이렇게 세 개를 묶은 것이었는데 민주에 해당되는 내용이 민권이라고 생각한다면 거의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지금 내 모습은, 삼민주의를 내세운 대통령 선거는커녕 시의원, 구의원에도 못나갈 상황이 되었다만 쑨원이란 이름을 들으면 그때의 그 꿈 많던 시절의 추억 때문에 흐뭇해지곤 한다. 성룡의 100번째 영화라는 타이틀을 내건 영화 신해혁명 역시 쑨원과 그가 내건 삼민주의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 영화로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쑨원 역을 성룡이 맡은 줄 알았었다. 영화 포스터에 군복을 입은 성룡 사진이 커다랗게 나와 있고 성룡을 내세워 홍보를 했으니 신해혁명의 주인공인 쑨원 역은 당연히 성룡이 연기하지 않을까 했는데 성룡이 아니라 조문선이란 배우가 맡았다고.
조문선이란 배우는 이안 감독의 결혼피로연이란 영화에서 동성애자 연기를 했던 그 배우인데 중국에선 쑨원 이미지에 잘 어울린다고 여겨지는지 신해혁명이란 영화의 타이틀롤을 맡았다. 동성애자 역할을 맡아 이름을 알렸던 배우가 중국의 국부 쑨원 역할을 맡았다니 뭔가 아니러니하긴 하지만 중국의 오래된 기존 관습을 깨버린다는 점에서는 신해혁명의 쑨원이나 결혼피로연의 동생애자 웨이퉁이나 비슷하다고나 할까. 20년의 세월은 결혼피로연이 곱상한 청년을 중년의 아저씨로 바꿔 놓았다.
영화 포스터에 큼지막하게 나와 있는 인물은 성룡이지만 이 영화는 성룡이 중심이 되는 영화가 아니다. 늙고 지친 표정의 성룡은 예전의 그 골목 골목을 누비며 책상과 의자 위를 휘젓고 다니던 성룡이 아니다. 쑨원의 친구 황싱 역할을 맡았는데 사실 성룡이 아닌 다른 이가 연기를 했다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역할이었다. 사실 조문산이 맡은 쑨원 역시 영화적으로 크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는 상징적인 존재이며 실제로 총칼을 맞대는 것은 우리로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민중이다.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어주는 인물 중 한 명은 위안스카이(원세개)로 청나라 황실과 혁명 세력 사이에서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인물인데 영화적으로는 위안스카이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으면 더 재미있겠다 싶기는 하지만 이 영화 신해혁명은 그런 식의, 재미를 노리는 영화가 아니라서 그런지 내 개인적인 취향과 달리 위안스카이의 출연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개혁세력을 배신하고 황실에 붙었다가 혁명세력과 손을 잡고 황실의 호흡기를 뗐던 위안스카이가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가 몰락하는 장면이 영화적으로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영화는 그 지점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쑨원도 황싱도 위안스카이도 아니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형장에 끌려가는 여인과 청년이 어쩌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것이다. 혁명에 가담했던 여인이 사형장에 끌려간다. 아이의 사진을 내밀며 어미로서의 정(情)을 흔들어 놓으려는 사형장 관리 앞에서 여인은 '나는 모든 아이를 위해 죽는다'라고 말하고는 단호하게 목을 내민다. 청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문도 좋고 학벌도 좋은 자네 같은 사림이 왜 반란에 가담하느냐고 회유하는 노회한 관리에게 청년이 도리어 혁명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며 역정을 낸다. 사형을 눈 앞에 둔 청년이 생사여탈권을 쥔 관리 앞에서 혁명을 논하고 희망을 이아기하며 관리를 질타한다. 영화는 이어 혁명에 가담했다가 목숨을 잃은 이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영화적인 연출에 의해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 혁명의 숭고함, 혁명세력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절대화된 부패 권력에 혁명이란 이름으로 도전하던 이들의 희생과 성취를 이야기하던 영화가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 군주를 자처하는 자를 무찌르며 열강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국을 만들어 중국인이 동방에 우뚝 서게 만든다 그게 혁명이다 중국은 쑨원의 사상을 잇고 있다 이렇게 정리된다는 점이다. 이웃나라의 관객으로선, 관군에 맞서는 청년들의 모습이며 민권과 민생을 주장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은 천안문 앞에 모인, 중국 당국의 유혈진압으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중국 당국은 쑨원의 삼민주의는 우리가 내세우는 이념이요 우리는 그 이념을 이어 강대국이 될 것임을 천명한다.
이 영화는 역사적으로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영화적으로는 재미가 없다. 역사 속 이 장면을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했나 비교해보는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성룡이나 조문선, 리빙빙 같은 이름난 배우들이 나온 영화치고는 한국 관객들의 영화적 취향을 영 만족시키지 못한다. 우리에겐 영원한 홍콩 아저씨, 홍콩 삼촌 같던 성룡이 중국의 국책 영화 같은 작품에서 군복 입고 무게 잡고 진지한 연기를 하고 있는 모습은 국내의 영화팬들에게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을 것이다.
홍콩이 중국 본토로 반환된 후 성룡은 급격히 중국 정부 친화적이 되어갔다. 우리에겐 자유도시 낭만의 섬 홍콩을 상징하던 인물이 중국 대륙의 마스코트가 되어 과격하고도 자극적인 발언마저도 과감하게 하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지만 성룡이 이렇게 된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성룡, 또는 재키찬, 진항생이라고 불리는 성룡이지만 그 성룡의 진짜 이름은 방사룡(房仕龍)'이었으며 그 방씨 성은 성룡의 아들 방조명에게 이어진다. 성룡에게 방씨 성을 물려준 성룡의 아버지는 국민당군의 스파이로 일했었고 그 때문에 진씨 성을 가진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고 한다. 방씨 성과 진씨 성 두 가지 성을 가진 성룡의 아버지는 장개석과 모택동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패함에 따라 신분상승의 꿈을 접어야만 했으며 이에 성룡은 가난한 유년기를 보내야만 했었다고.
한국의 인기작가 이문열씨가 그 아버지의 좌익 활동으로 인해 이념적으로 한쪽 포지션을 취하게 되었듯 성룡 역시 그 아버지의 스파이로서의 과거가 오히려 그를 더 한쪽으로 내몰았는지 모른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성화 봉송 주자가 된 성룡은, 성화 봉송을 막으려는 자는 매서운 쿵후의 맛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발언하기도 했고 이런저런 중국 홍보 영상에 출연하기도 했다. 명절날 또래 친척들과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성룡의 홍콩 영화가 아닌, 중국 정부의 이념을 선전하며 국가의 번영을 비는 영화에 출연한 성룡의 모습은 영 낯선 모습이다.
한국의 소설가 이문열씨가 한국 출판계의 종이값을 올렸다면 성룡은 동북 아시아의 필름값에 할리우드의 필름값까지 올린 대단한 인물인데 아버지의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그 아들들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 것 같아 묘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성룡의 100번째 영화라고 영화는 그럴싸하게 홍보되었지만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금시조 등의 작품으로 문학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문열 작가가 선택이란 제목의,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의 소설을 내놓았을 때가 이런 기분 같았다고나 할까. 성룡은 홍콩영화를 추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영웅이다. 그 영웅이 정치적 편향성으로 인해 일그러지지 않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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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