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리뷰 코너

크눌프
- 작성일
- 2014.10.27
무사 노보우: 최후의 결전
- 감독
- 이누도 잇신
- 제작 / 장르
- 일본
- 개봉일
- 2014년 6월 5일
영화가 시작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지휘하는 수공(水攻) 작전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대규모 수몰 장면이 스펙타클하게 선보여진다. 적군이 있는 성(城)을 향해 내려가는 거대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으며 군대를 지휘하는 히데요시와 그런 히데요시를 존경스럽게 바라보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얼굴이 대조를 이룬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이때의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닌 하시바 히데요시로, 미천한 가문 출신인 히데요시는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두 장수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의 이름에서 한글자씩 따와 하시바(羽柴)란 성(姓)을 만들어 붙였다. 니와 나가히데, 시바타 카츠이에를 향한 일종의 오마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에 일어난 권력싸움에서 니와 나가히데는 대세가 된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갔고 히데요시의 반대편에 선 시바타 카츠이에는 히데요시와 크게 맞붙었다. 그리고 히데요시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카츠이에는 할복 자살을 택했고 카츠이에가 죽을 때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이자 카츠이에의 아내인 오이치 역시 죽음을 택했더랬다.
이런 권력투쟁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을 따르는 직계가신들을 키워낸다. 히데요시 본인이 미천한 출신이었기에 기존의 귀족 출신 무사들은 그의 밑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고 설령 들어온다고 해도 끝까지 충성을 바칠 것이라 믿기 어려웠더랬다. 그리하여 히데요시는 우리네 고려 시대 역사로 따지면 신진 사대부 쯤에 해당하는 젊은 엘리트들을 자신의 충복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는 그 자신이 파격적인 성격이었던 탓에, 미천한 신분인 히데요시를 편견없이 중용했으나 기존 귀족 세력들은 그것이 불만스러웠던 모양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경우는 미천한 출신인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가 전투에 참전하라는 노부나가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에 불복, 이런저런 원한이 쌓여있던 노부나가를 혼노지에서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통일 직전의 노부나가가 부하인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살해당하자 정치적 공백이 생겼고 그 공백을 재빨리 채운 자가 바로 하시바 히데요시였다. 니와 나가히데를 자신의 밑으로 데려오고 시바타 카츠이에를 죽음으로 내몬 히데요시는 하시바라는 성 대신 도요토미란 성을 사용하며 위세를 높인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노부나가의 직계가신도 아닌데다가 귀족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직계가신을 키우는데 공을 들인다. 오다 노부나가가 질풍처럼 날뛰며 통일을 눈 앞에 두었으나 혼노지에서 사망,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시기에 대권을 장악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의동생 같은 존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한바탕 일전을 겨룬 뒤 이에야스와 정치적인 야합을 맺는데 성공한다. 혼노지의 사건 이후 명분으로 삼은 것은 오다 가문의 후계자 옹립 문제였지만 이에야스와의 갈등이 해결되지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후손들마저도 살벌하게 내쳐버린다. 천하통일을 눈 앞에 둔 히데요시에게 남은 것은 여전히 그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고 있는 호죠 가문의 오다와라성(城)이었다.
이제 일본 통일의 마지막 퍼즐 한조각을 앞에 둔 히데요시는 자신의 직계가신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려고 했다. 호죠 가문이 히데요시의 대군을 막아내긴 어려운 것이 당연했으니 히데요시는 자신이 아끼는 직계가신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호죠 가문 밑에 있는 조그만한 성인 오시성(城)을 제압하도록 한다. 히데요시가 키우는 직계가신들이 하나씩 큰 공을 세우면 향후 통일된 천하를 효율적으로 관리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 히데요시의 큰 그림이었기에 이시다 미츠나리 입장에선 시원한 압승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오시성의 성주조차 항전(抗戰)에 회의적이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대리 성주가 된 나리타 나가치카(노무라 만사이)는 생각이 달랐다. 항복을 권하는 사신의 강압적인 태도에 발끈한 나가치카는 항전을 결심하고 성 안 백성들을 모은다. 멍청이(노보우)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나가치카는 농민과 함께 뒹굴고 놀던 자인데 자신들과 함께 춤을 추고 씨를 뿌리며 희노애락을 함께 하던 이가 새로운 주군이 되어 침략군을 막아내려고 하자 성 안 백성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500여명의 성 안 백성들과 2만의 미츠나리 군대가 격돌하지만 나가치카의 지휘 안에 단결한 오시성(城)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오시성의 원래 성주였던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의 딸이자 피지배층인 농민의 편이었던 카이히메(甲斐姬)와 그런 카이히메를 도와줬던 나리타 나가치카(노무라 만사이)는 백성들을 훌륭하게 지휘한다. 멍청이(노보우)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기품이 없는 나가치카였지만 그런 그에게도 순정이 있었다. 성주의 딸이자 말괄량이인 카이히메(에이쿠라 나나)를 흠모하고 있었던 것. 그런 그의 눈 앞에서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使者)란 놈들이 카이히메를 인질로 바칠 것을 명령하자 나가치카는 극도로 흥분하고 만다. 그런 나가치카의 모습에 카이히메의 눈엔 하트뿅뿅. 이후의 상황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살라딘의 대군 앞에서 예루살렘 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발리안(올랜도 블룸)과 그를 사랑하는 시빌라(에바 그린)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이들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이랄까.
이시다 미츠나리의 2만 대군이 살라딘의 대군 같지 않듯이 나가치카가 이끄는 백성들 역시 발리안이 이끄는 예루살렘 관민들 같진 않았다. 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1, 델마와 루이스, 글래디에이터, 블랙호크다운, 한니발, 킹덤 오브 헤븐, 프로메테우스 등의 작품을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과 달리 구구는 고양이다, 메종 드 히미코, 우리 개 이야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같은 다소 잔잔한 영화를 만들어낸 이누도 잇신 감독은 격렬한 전쟁의 상황 속에서 나가치카(노무라 만사이)의 능청스러움을 곳곳에 박아넣어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영화 음양사 등을 통해 국내 관객에게도 얼굴이 알려진 노무라 만사이는 일본 전통 문화인 교겐의 전승자로, 일본 내 인간문화재급 인물이기도 한데, 이 영화 무사 노보우에서 주인공 나가치카 역을 맡아 백성들과 함께 논두렁 위에서 그리고 활과 총을 겨루고 있는 적진 앞에서 능청스럽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가뜩이나 2AM의 멤버 조권을 닮은 얼굴에 춤 추고 노래를 부르며 깝을 떠니 더욱 더 우리네 조권을 닮아보인다고나 할까.
몇 백 명 안되는 성 안 농민들로, 전투에 단련된 수 만의 군사들을 막아내려니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이들의 소식이 전해지자 나가치카는 백성들보다 더 슬프게 운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은 나가치카를 위로하며 결전의 의지를 다진다. 어서 빨리 전공을 세워야 되는데 나가치카 및 성 안 백성들의 항전의지로 인해 승리가 미뤄지자 다급해진 이시다 미츠나리는 영화의 오프닝에 나온, 히데요시 군의 필승전략 수공(水攻) 방법을 택한다. 필승 전략이라고 생각한 수공마저도 견뎌낸 오시성(城). 하지만 작은 성의 적은 백성들로는 견뎌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초토화 직전의 오시성을 나온 나가치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고, 적진 코 앞에 작은 배를 띄워 그 위에서 혼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눈 앞에서 히데요시의 군세(軍勢)를 비웃는, 나가치카의 코믹한 춤이 이어진다. 그야말로 깝을 떤 것이었다. 나가치카의 조롱을 지켜보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혼자 깝을 떨고 있는 나가치카(노무라 만사이)를 향해 조총을 발사하도록 한다. 총에 맞고 쓰러진 나가치카의 모습을 목격한 오시성(城) 관민들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새롭게 다진다. 춤을 추며 깝을 떨다가 적군의 총에 맞고 쓰러져 물에 빠지긴 했지만 목숨을 잃지 않은 나가치카는 성으로 돌아가 백성들을 다시 지휘한다. 정신을 차린 나가치카는, 총에 맞은 나가치카의 복수를 위해 항전의 의지로 백성들이 똘똘 뭉쳤다는 소식과 나가치카의 겂없는 행동에 질려버린 적군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게된다.
나가치카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전해진 소식은 그에게 있어 참으로 비통한 것이었다. 오시성의 원래 성주인 나리타 우지나가(成田氏長)는 성을 비우고 본성(本城)인 오다와라성에 갔었는데, 그 오다와라 성의 주인인 호죠 가문에서 항복의 의사를 밝히고 만 것이다. 본성이 함락되기 전에 작은 성인 오시성을 항복시켜 단독으로 공을 세우는 것이 미츠나리에게 주어진 미션이었는데 몇 백 명도 안되는 오시성 하나를 그동안 이겨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 나가치카의 목숨을 담보로 한 행동에 항전의지를 드높인 오시성 특공대들이 오시성으로 물을 퍼붓는 도구가 된 둑을 터뜨려 미츠나리가 주도한 수공마저 무산시킨다. 성을 물바다로 만든 물은 성 밖으로 빠져나가고 진흙탕이 된 바닥이 드러난다. 이제 전투는 새로운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최후의 결전이 이뤄질 무대가 열렸을 때 본성인 오다와라성이 항복했음이 양측 모두에게 알려진다. 당시의 일본 내 장수들은 본성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항복을 하면 본성에 잡아놓은 인질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경우가 있었기에 본성이 무너지기 전까지 항전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관행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젊은 시절에 당시의 대세였던 이마가와 가문 밑에서 그들의 가신처럼 부려질 때가 있었고 그러한 당시의 관행 때문에 자신과 가신들의 가족들을 이마가와가 다스리는 성으로 인질로 보내야만 했었다.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의 적인 오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자 그 인질들은 잔인한 처형 끝에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오시성이 오다와라 본성보다 먼저 항복을 했으면 오다와라 본성에 들어간 성주 나리타 아지나가 일행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건만 멍청이(노보우)로 불리던 나가치카의 지휘 아래 오시성은 오다와라성보다 오래 버텨 승리 아닌 승리를 이끌어내었다. 여기에 한 수 더 떠 이시다 미츠나리와의 협상에서도 당당하게 임하여 성 안 백성들의 피해를 줄인다.
단, 마음에 두었던 카이히메가 히데요시의 측실로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지 못했다. 당대의 미녀로 이름났다던 카이히메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지만 히데요시의 자식을 낳지는 못했고 도요토미 가문이 망하고 이에야스의 천하가 되었을 무렵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당당하게 협상에 임했던 나가치카(노무라 만사이)는 성 안 백성들을 위한 여러가지 조건들을 제안한다. 하지만 협상의 마지막에 상대가 제시한 카이히메 건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군말없이 그 조건을 받아들인다. 카이히메가 있는 곳을 슬쩍 바라본 나가치카는 그 상황에서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동안의 유리한 조건이 죄다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 자칫 학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카이히메를 향한 사심(私心)을 접고 백성들을 위한 대국(大局)을 바라본 나리타 나가치카는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중용되어 67세까지 천수(天壽)를 누렸다고 한다.
몇 백 명 안되는 작은 오시성, 멍청이(노보우)로 불리는 대리 성주 나가치카 하나 못 꺾은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후 히데요시의 직계가신으로 입신양명의 길에 오르지만,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여전히 없었는지 히데요시 사후 벌어진 권력쟁탈전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에야스의 손을 잡은 무장들에게 패해 고문 끝에 참수되는 비극을 겪는다. 히데요시의 직계가신들은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문치파와 가토 기요마사 등의 무장파로 나눠졌는데 조선침략을 기점으로 두 계파의 사이가 크게 벌어진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문치파의 리더가 되어 무장파를 탄핵하고 입만 살아있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전횡에 분노한 무장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문치파와 일대 격전을 벌인다. 그 전투가 바로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 전투가 끝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오시성 전투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장수로서의 빛나는 명성을 쌓았다면 무장파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가토 기요마사 등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쉽게 공을 세우라고 보낸 작은 오시성 하나 점령하지 못한 미츠나리는, 입만 나불나불거리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는 편견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그가 주도한 세키가하라 전투 역시 문치파가 유리하게 포진한 입장이었건만 군사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장수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탓이었을까, 배신자가 나온 끝에 패배하고 만다. 히데요시의 수공 성공 장면과 미츠나리의 수공 실패 장면이 영화의 앞뒤를 장식하는 이 영화는, 수공을 이용한 전투의 승패(勝敗)를 통해 히데요시의 군사적 재능과 미츠나리의 군사적 재능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주군인 히데요시의 뜻을 이어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형장의 이슬이 되었던 이시다 미츠나리의 운명을 슬쩍 암시한다고나 할까.
참고로 이 영화 무사 노보우: 최후의 결전은 노보우의 성(のぼうの城)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2011년에 TBS 개국 60주년 작품으로 완성된 이 영화는 개봉되기 직전 2011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동안 개봉이 연기되고 수공으로 인한 수몰 피해 장면이 일부 편집되었다는 뒷얘기가 있기도 하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