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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 공개여부
- 작성일
- 2021.3.31
할아버지는 깨어 있는 동안에는 늘 방 안에 틀어박혀 화선지에다 붓으로 한 행 한 행 그 시를 적어내려 갔다. 결국 그 시는 한국 현대사의 모든 격동기를 온몸으로 지나온 한 남자의 생애를 담은 203행의 대서사시로 드러났다. 시를 다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가족과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들을 모두 불러 모은 뒤, 안경을 쓰고 풀로 이어붙인 화선지를 조금씩 밀어 올리며 느릿느릿 그 시를 읽었다. 법률가를 꿈꾸던 학창 시절의 소망을 피력할 때도, 남지나해 어느 물결에 모두 밀어 넣고 돌아온 전쟁의 참상을 다시 떠올릴 때도, 한국전쟁 이후 가족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던 떠돌이 시절을 묘사할 때도, 뜻하지 않았던 말년의 치욕스런 교도소 생활을 두 줄로 간략하게 서술하고 지나갈 때도 할아버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건 그 시를 듣고 있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고 있다. 그의 소설은 마치 에세이처럼 읽힌다. 주로 가족의 일상사가, 자신의 삶이 소재가 되어 표현되는 이야기는 그만큼 현실적이다. 이 소설에서는 할아버지가 화젯거리도 등장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남양군도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지녀온 한 장의 흐릿한 여인의 나체 사진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특별한 삶의 여정을 보여주는 출발점이 되었고, 나는 그 할아버지의 기억을 흐릿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할아버지의 기억을 쫓아 고향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지인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위의 얘기들은 할아버지가 살아낸 격동기의 역사를 서술해 놓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한국동란, 그 이후 떠돌이의 삶(간척 사업), 간첩단 조작 사건 등 굵직한 현대사의 길들을 비벼대며 고통스럽게 지나왔다. 그 사건들이 주는 의미를 할아버지를 통해 새김질해 보고 있다. 그들이 모여 한 인생이 얼마나 파란만장하게 엮였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현대사가 어떻게 개인을 죽여가면서 이루어져 온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글을 읽으면서 겸연수가 들려주는 지난 이야기들이 마음속에 진한 아픔으로 전해져 옴을 만났다. 그들의 일부는 더불어 아눈 세월도 있기에 말이다. 이야기가 정말 잘 읽힌다. 대단한 화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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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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