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뷰
jeileen
- 작성일
- 2013.6.10
숨, 쉴 틈
- 글쓴이
- 김대욱 저
예담
1. 씁쓸~ 하구만!
대학 때부터 함께 임용고사를 준비했던 친구가 작년에 드디어 합격소식을 알려왔다. 가을학기에 발령이 날 때까지 시간을 틈타 예비교사들이 가장 꿈꾼다는 ‘대기 발령 중 유럽 배낭여행’을 가기로 했단다. 내게는 합격이야기만큼이나 여행 이야기도 꺼내기 미안해 하는 친구에게 쿨하게 이야기 했다.
“야~ 괜찮아. 괜찮아. 난 매일매일 여행 중이거든? ㅋㅋㅋㅋㅋ”
지금 이 순간, 방 안에서도 ‘남 몰래’ 여행을 떠나고 있다는 저자는 여행의 의미, 특히 다른 문화권으로의 여행이 갖는 의미까지 부정하는 것 같진 않다. 다만, 이거다.
하지만 어떡하나. 나의 여행은 여기에 있는 것을. 지금 여기가 바로 여행의 순간임을 인식한 순간 공기를 말랑해지고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그 끝에서 나는 자유를 보고 어제보다 좀더 자란 나를 만난다. (p.6)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마도 이건, 여행?’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나는 원효대사의 해골물 이야기가 떠올랐다. 때때로 지금, 여기를 여행하듯 만끽하라는 말이 위로처럼 들리고 마음먹기 나름이다 싶기도 하지만 한때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거.....씁쓸~하구만”
2. 첫인상 : “아…… 베끼고 싶다.”
그의 담백한 기억과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나는데 세상에 어떤 이야기보다 위트있고 신선했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여행가라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첫 장에 봐도 분명한 건 그가 자기만의 색을 가진 훌륭한 ‘글쟁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무덤덤함이 애잔함을 밀어낼 때 ‘방’은 ‘방구석’이 됐다. 방구석이 된 방은 답답증을 유발했고, 언제부턴가 나는 방에서의 탈출을 열망했다. 괴상한 모순이었다. 방이야말로 내 최후의 보루였다. (p.15)
에세이를 볼 때면 시나 소설을 볼 때와 다르게 나도 내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고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나 내가 쓰는 글에는 내 경험과 일상이 어떤 교훈이나 깨달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특히 그것을 글로 남길 때는 더더욱.
그는 가만 가만 자신이 관찰하고 느낀 것을 담백하게 이야기하면서도 무게가 어느 한 곳으로 처지지 않게 가볍고도 안정감 있는 글을 쓰는 사람 같았다. 곁에 두고 한 번쯤 필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에세이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님에도 내가 최근에 본 글 중에 가장 매력적인 문장들이었다. 다르게 이야기 하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흉내 정도는 내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편안한 문체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발소리만 해도 그렇다. 어린이집이나 학교로 향하는 올망졸망한 발소리, 거기에는 몽실몽실한 신발의 아늑함이 섞여있다. 이 소리가 햇살에 녹아 자박자박 방으로 흘러들어오면 그 조그마한 발의 하루가 그려진다. 그 발이 종일 바라보는 세상은 나의 세상과 다를 것이다. 더 투명하고 아름답지 않을까? 늘 어제와 다른 발바닥으로 아침을 맞는 것. 그 맑음이 부러워,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발을 주무르고는 한다. (p. 44)
3. 아마도 이건, 여행
A.M 03:25 - 새벽의 침묵이 주는 황홀함
A.M. 10:47 - 아이의 시간을 사는 어른의 몸
P.M. 07:10 -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P.M. 09:32 - 당신을 기다리는 불빛
P.M. 11:13 - 내일이 있으니까
그가 크레파스로 그린 다양한 조도의 타임라인을 따라가 본다. 문득 나는 저 시간에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혹은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스케줄 표에 시간대별로 해야 할 일이 적혀 있지만 정작 그 안에 ‘나’라는 사람과 사고, 감정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이미 리뷰를 완성하기로 한 시간은 모두 지나버렸다.
일을 시작하느라 핑계로 책을 놓기 시작했고, 그렇다고 표지나 제목으로만 리뷰를 작성하고 싶지는 않았다. ‘숨 쉴 틈’을 찾지 못하고 늘 걱정스럽고 쫓기는 듯한 마음으로 책 표지만 쓰다듬다 잠들기가 여러 날이었다. 결국은 기한을 한참 넘겨서야 틈을 찾았다. 어떻게든 숨 쉴 틈에 <숨 쉴 틈>을 읽게 된 건 너무 다행스러운 일이다.
신기하게도 거기에는 꼭 숨 쉴 틈이 보였다.
나는 그 틈을 통해 숨을 쉬면서 먹먹함을 흘려보내고는 했다.
그건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나만의 짧은 여행이었다. (p. 96)
처음 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읽고, 서문과 목차를 볼 때까지만 해도 자꾸만 ‘오타쿠’나 ‘히키코모리’가 떠오르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그 스스로도 그것은 아니라고 한 번 정리해 주기는 하지만. 그는 ‘방’에서 혼자 숨 쉴 틈을 만끽하는 ‘외로운’ 방랑객 같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책을 읽을수록 씁쓸할지언정 쓸쓸한 맛은 적었다. 이유가 뭘까? 그것은 ‘사람’ 때문이다. 부모님과 여동생, 할머니, 여자친구, 동네 아이들과 주민들. 추억 속의 친구들까지. 특히 좁은 방을 함께 쓰던 여동생이 저자보다 먼저 결혼을 해 독립하고, 아이의 엄마가 돼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꽤 벅찬 서사였던 것 같다. 그가 홀로 고립되지 않고 사람의 온기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왜 그렇게 다행스럽게 여겨졌는지 나도 모르겠다.
4. 응답하라, 1980년대!
최근에는 포토에세이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전문가용’ 카메라 한 대씩은 구비하는 요즘, 여행 관련 책은 더더욱 사진의 퀄리티가 매우 좋다. 이병률의 산문집이 대표적이겠다. 그런데 이 책, 사진이 한국을 벗어나지 않고 매우 일상적인 것까지는 좋은데 당장 내 휴대폰을 뒤져봐도 이보다 나은 사진 몇 장쯤은 얼른 찾을 수 있겠다 싶다. 좋은 글에 비해 사진이 좀 아쉽다 하는데 한편으론 이 사진들이 자꾸만 이 책의 성격을 재확인하게 한다. ‘떠나지 않은 여행’, ‘잠들지 않은 방으로 히치하이킹’ . 그런 면에서 사실 그의 글과 가장 잘 맞는 사진이라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자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나와 적어도 2년~3년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사람 같다. 책받침, 피구왕 통키, 보물섬 프라모델, 게임팩, 대학 캠퍼스의 풍경까지. 처음 검색 엔진을 사용하게 되던 때, ‘돈까스’와 마이클잭슨의 ‘힐 더 월드’에 얽힌 추억까지 나와 너무도 닮아 잠시 흔들렸다. 이 세대에 이토록 공통점이 많은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 저자와 내가 유독 통하는 면이 있는 것일까. 그가 소개한 ‘최고로 치는 돈가스 집’이 어딘지 너무 궁금해 졌다. ^^
꼭 1997년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10대와 20대를 따라 응답받는 느낌이었다. 누구보다 1980년대 출생자들에게는 꼭 한 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숨 막히는 긴장 상태가 아니라 ‘숨 쉴 틈’에 읽으면 더 좋을 책......
한가한 시간, 그렇게 주변을 가만히 보고 싶다.
운이 좋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두리번거리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게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p.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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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