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소설

책읽는베토벤
- 작성일
- 2013.8.2
프랑스 중위의 여자 (하)
- 글쓴이
- 존 파울즈 저
열린책들
지극히 개인적인 편견이겠지만, 남자가 자라기는 하는 걸까, 신체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혹은 사회관계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것만큼 골똘히, 의아하게 생각해 본 문제는 없다. 내가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 역시 일개 여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판단으로 남자란... 여자란... 운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 동안 살아오면서 부딪혀 온 무수한 남자들만 보아도, 남자는 나이만 먹고 있을 뿐 자란다거나 성숙해진다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나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내 주위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역사의 전체 흐름에서 계속 되풀이하여 일어나고 있다는 말인지.
소설의 배경, 빅토리아 시대라는 것에 대해서도 한 발 물러서고, 작가의 소설적 능력이 탁월하다는 비평가들의 찬사에서도 벗어나서, 그저 주인공 '찰스'만 대상으로 삼아 몇 자 적어 본다. 서른두 살의 미혼이면서 돈 많은 상인의 딸인 약혼자를 두고 있고, 물려받은 재산이 있어 앞으로 살아갈 일에도 별 걱정이 없는, 그런 주인공의 이야기. 소설 제목만으로 여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인 줄은 상권을 다 읽었을 때 쯤에야 알았다고나 할까.
소설가의 말솜씨가 기막힐 정도로 뛰어나기는 한 모양이다. 줄거리만 잡자면 정말 별 것 없는 몇 가지 사건뿐인 것을, 그 순간순간 나를 몰입시켰으니, 게다가 찰스에게 감정이입까지 확실히 시켜 주었으니, 내가 남자도 아님에도 그의 마음이 어찌나 절절히 와 닿던지. '그러지 말았으면, 하지 않았으면, 제발 돌아섰으면, 참았으면, 물리쳤으면....' 하는 내 바람이 소설 속 그에게는 전혀 닿지 못하고, 매번 그는 나를 실망시키면서 사고를 치고 있었다. '어이구, 이 남자야,' 하는 한탄이 저절로 솟을 정도로.
그래도 그것만큼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도 절실했다는 것, 매순간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또 믿어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 그 마음 바탕을. '남자'가 자라지는 못하더라도 나름 성실했다는 것.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포기를 하든, 자라지 못해서 더 순수하고 자라지 못해서 더 어리석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라'에게로 대책 없이 빠져들어가는 '찰스'의 마음 상태 변화를 보면서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정녕 나는 남자의 어떤 진실한 면 일부를 본 것 같기 때문이다. 일세기 전 영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한 편에서 내가 남자의 일면을 봤다고 말하기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리고 그게 남자 입장에서는 또한 바라는 내용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그렇게 깊이깊이 읽고 만 것을. 남자의 미성숙함과 어리석음을 충실하게 읽고 만 것을.
앞으로 '삿포로'라는 말에는 이 책이 떠오를 것 같다. 여행 내내 내 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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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