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사회

옥수동
- 작성일
- 2022.2.23
고립의 시대
- 글쓴이
- 노리나 허츠 저
웅진지식하우스
<외로움이 사람을 날카롭고 공격적으로 만든다>
외로움은 혼자 남아있다는 , 고립되었다는 느낌이다.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외로움은 느껴진다. 내가 사람들과 적절히 연결되어있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고, 온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서로가 난로가 되고 둥지가 되고 피난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함께 해야한다. 그런데 4명 중 한 명이 단독가구인 서울만 봐도 외로움은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어릴 때 사랑의 학교란 만화에서 혼자 사는 노인이 겨울을 나기 위해 일부러 좀도둑질을 하는 에피소드를 본 기억이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65세 이상 노령층의 범죄와 수감률이 급격히 증가한다고 한다. 그 원인으로 사회적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옥을 선택하는 경향을 지목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가족이 없고, 혼자 사는 노인일수록 범죄를 저지르는 경향이 강했다.
이들의 범죄는 공격성이 먼저일까, 외로움이 먼저일까? 일반적으로 외로움, 고립감을 느끼게 되면 안으로 침잠하고 우울해하면서 누군가 만나기를 바라는 심리와 행동을 자극한다. 그런데, 여러 연구에서는 의외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공격성과 배타성, 날카로움이다.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노리나 허츠의 ‘고립의 시대’ 에서 외로움, 고립감을 경험하는 이들이 히틀러나 트럼프를 지지하고, 극우적 행동을 한다고 분석한다.
그 메커니즘은 이렇다.
외로움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은 인간에 대한 온기를 느끼고 싶다는 것과 타인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며 자신을 보호할 방어책을 먼저 만든다. “날 혼자 내버려둬!”라는 신호를 적극적으로 보낸다. 또 외로움이 지속되면 공감능력이 도리어 떨어진다. 공감할 이유나 기회가 적어지고, 자신의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것도 줄어든다. 고통받는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하기보다 주변에 위협을 할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는 경계심이 도리어 올라간다.
테러를 하는 극단적 종교집단의 자살테러를 생각해보자. 어떻게 종교를 믿는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싶다. 이들이 저런 극단적 종교단체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외롭고 고립된 삶을 살던 사람인 경우가 많다. 내 주변 공동체보다 더 강한 결속력을 가진 곳을 자연스럽게 찾아간다.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는 곳으로 가고, 터널 비젼이 된다. 공감능력은 떨어져있고, 선택적 공감, 즉 자신의 새 공동체의 감각에만 맞춰진다. 그래서 자신의 테러 행위로 일어날 불특정 다수의 가족이나 당사자의 아픔은 느껴지지 않는다.
즉, 외로움은 소속감을 얻는 것으로 줄어드는데, 문제는 외로움이 강할수록 강한 소속감을 원한다는 것이다. 외로움이 많은 사회 개인일수록 더 강한 소속감을 주는 곳을 찾는 반작용이 생긴다. 극우, 유사종교단체, 민족주의, 배타적 집단에 호감을 갖고 거기에 기꺼이 들어간다.
또 하나, 코로나19와 4차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자동화는 이러한 외로움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다. 자동화가 많이 진행된 곳, 로봇이 많이 보급된 국가일수록 극수주의적, 민족주의적, 극우정당 투표율이 증가한다는 연구도 흥미로웠다.
정리하자면, 내가 누군가와 커넥트 되어있다는 느낌, 적당한 거리안에서 편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있다는 느낌은 외로움을 줄여준다. 외로움 뿐 아니라 의도치 않는 날카로움과 공격성 까지도 줄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외로움은 나를 위축하게 하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주변을 배타적으로 보고, 공감능력을 떨어트려서 나를 어느 순간 공격적이게 만든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그런 성향이 되버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상태에 말이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오디오클립으로 들어보기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625/clips/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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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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